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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황권의 발흥과 몰락

중세교회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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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한
기사입력 2005-11-25


어원상 교황(pope)은 헬라어 ‘papas’, 즉 ‘아버지’에서 유래하였다. 이를 기초로 라틴어의 ‘papa’가 출현하였다. 이 용어는 초기에는 교회의 중요하고 존경받는 모든 감독들을 가리켰으나, 점차 로마의 감독에게만 부여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16장 17∼19절에 기초하여 베드로를 최초의 로마 감독으로 간주하였다. 그 후 베드로의 지상 직분은 로마의 교황에게 위임되었다.
 
교황은 최상급 대주교로서 막강한 법적 권위를 행사하였다. 실제로 로마의 주교는 주교들의 머리이자 정점으로 전세계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초기와 달리 자신의 권한을 증대하여 로마의 황제처럼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와 교회의 수장으로 역대 교황들의 편지와 그밖의 모든 법률 조항과 교회법을 배경으로 중세 교회의 통일을 이루었다. 소위 하나님이 내린 신적 권력으로 영권과 세속권을 통합적으로 누렸다.
 
교황권의 교회사적 발전
 
381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황청의 지상권을 인정하였다. 그 후 410년 감독 레오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 설립의 초석으로 삼으셨으므로 로마의 감독이야말로 교회의 우두머리라 믿었다. 그의 사후, 친구인 힐라리우스는 계속 그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등장으로 교황권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몇 번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추앙으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는 정열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빈민들을 위한 식량 공급과 상수도의 수리, 수비대의 훈련으로 사기를 앙양하였고, 로마 일대의 통치자로서 평화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들을 강구했으며, 영국에 첫 선교사 어거스틴을 파송하였다. 또한 방대한 저술을 통해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 교황권
 
교황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 1073∼1085년)의 사후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7세로서 12년 동안 교황으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치적을 세우며 미증유(未曾有)의 교황권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리하여 세계 신정(神政)국을 구상하여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황권을 하나님이 주신 우주적인 주권으로 보고 이 권세 앞에 세상 권세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서간집에서 교황의 지위에 대하여 “교황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 로마 교회는 오류를 범한 적이 없고, 종말까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설립되었다. 교황만이 주교들을 폐위하고 복권시킬 수 있다. 교황만이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주교구를 신설하며, 기존 주교구를 분할할 수 있다. 그리고 교황만이 총회를 소집할 수 있고, 교회법을 인준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제후들은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진 하인리히 4세를 카놋사에서 굴복시켰다.
 
인노켄티우스 3세와 보니파키우스의 교황권
 
교황권은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1161∼1216년)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경건했으며, 교황으로서 정력과 상식과 강한 도덕적 설득력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교황 제도는 하나님이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제도였다. 교황은 교회의 영역뿐 아니라 전세계의 정치까지도 위임을 맡았다고 믿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달과 태양의 관계와 같아서 마치 달이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국가는 교황 제도의 영광 안에서 빛을 발하며, 교황에게서 권력을 끌어낸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였으나,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불렸다.
 
또한 그는 교황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두 가지 검, 곧 영적인 권세와 세속적인 권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신부들처럼 왕들과 왕족들도 교황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교황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감독과 지방의 교회 회의의 결정을 폐기할 권리가 있으며, 왕도 자기 뜻대로 임명하거나 폐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으며, 제왕들도 그의 권위 앞에서는 모두 허리를 굽혀야 했다.

그후 교황권은 80세의 노령 보니파키우스(boniface Ⅷ, 1294∼1303년)에 이르러 절정에 올랐다. 보니파키우스는 국가나 교회에 있어서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오히려 인노켄티우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적인 지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303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교황권의 쇠퇴와 몰락
 
 6세기 말 그레고리우스 1세와 함께 시작된 교황권은 14∼15세기에 급속히 쇠퇴하였다. 주된 이유로는 1309년 교황 클레멘트 5세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그 후 분열된 교황청은 1377년까지 약 70년 동안 프랑스 군주들의 세력 하에 바벨론의 포로처럼 되었다.
 
 또한 교황청의 재정 악화와 동시에 당시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의 대두 때문이었다. 사실 1300년경에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점차 가톨릭체제로부터 벗어났다. 그 동안 가톨릭은 교황을 정점으로 막강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대학이 설립되면서 크고 작은 민족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서로 결속하는 등 다양한 민족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한편, 여러 왕들이 황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왕은 자기 영토에서 황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군주들은 자기 영토 내의 교회를 통제하되 심지어 교황권에 도전할 정도로 통제하였다. 실제로 16세기 영국 왕 헨리는 자기의 영토 내에서 교황권을 가질 정도였다.
 
교황권의 현대적 이해와 적용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두가 한 지체를 이루는 우주적 영적 실체이다. 이 교회는 효과적인 복음 증거와 개 교회의 질서와 화평, 영적 복지를 위해 직분자들을 세웠다. 그러므로 세움을 입은 종들은 희생과 수고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격려해야 한다. 그러나 가톨릭처럼 교회의 직분이 지나치게 교권에 사로잡혀 본래의 직무에서 이탈하면 혼란과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개혁자 칼빈은 교회를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가톨릭과 달리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직자와 평신도가 직분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유기적 통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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