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 송이 꽃 앞에서 서 보았다. 아름답기도 하고 규모도 놀랍지만, 마음의 뭉클한 감정은 미미하다. 한꺼번에 많은 꽃을 보니 한 송이 한 송이를 관심 있게 봐줄 여력이 없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꽃은 하나도 없을 텐데, 꽃마다 예쁘다고 말해줄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 ▲ 억만 송이 꽃 앞에 서 보았지만 그들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없었다. © 공학섭 |
이토록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들을 데면데면 지나치려니 너무 미안하다. 나태주 님의 <풀꽃> 시가 절로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꽃 맛을 제대로 누리려면 꽃과 마주하여 향기도 맡고 자세하게 오랫동안 보아야 한다.
김춘수 님의 <꽃>이란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건성건성 지나친 꽃들은 내게 꽃이 되어주지 못한다. 다정하게 꽃 이름을 불러주어야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는 것이다.
![]() ▲ 마을 뒷산에서 만난 야생화다.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 공학섭 |
억만 송이 꽃들과 친밀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좋을까? 나는 홀로 서 있는 외로운 꽃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같은 꽃 중에서도 생김새가 평범하지 않은 꽃들과 귀퉁이에서 관심을 받지 못한 꽃에게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다.
사람의 관리를 받고 있는 화려한 꽃들보다 거친 환경 속에서 홀로 피어난 코스모스 한 송이에 마음이 더 끌린다. 야생에서 자란 꽃은 강하고 향기도 진하다. 사랑스러움도 더 한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끝에 얻은 꽃이어서 그렇다.
![]() ▲ 자잘한 국화들 틈에 군계일학처럼 함박 웃음을 지으며 피어난 순백의 국화가 참 아름답다. © 공학섭 |
집단으로 심겨 있는 꽃에겐 마음이 덜 간다. 인위적인 꾸민 꽃들은 아무리 멋스러워 보여도 감명을 주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돈을 들여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억만 송이 꽃 앞에서 모든 꽃들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해 본다. 반면 하나님은 무한하셔서 화수분처럼 무한정 사랑이 쏟아져 나온다. 80억 인류에게 줄 수 있을 만큼. 사랑이 부족한가? 사랑이 풍성한 그분에게 나아가보라.
![]() ▲ 진홍색과 노란색이 섞인 국화가 나의 시선을 끈다. © 공학섭 |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무진하다. 조개껍질로 바닷물은 퍼낼지언정 그분의 사랑은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이 그 증거다. 그 큰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는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예수 믿음만이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