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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진실과 정의로 노예를 해방한 영국의 기독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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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나
기사입력 2008-03-10

지난 7일, 서빙고에 위치한 온누리교회에서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어메이징 그레이스’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는 교계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끌었고 18세기 영국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했고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갈등을 잘 표현해 연출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 "어메이징 그레이스"     ©

가장 먼 여행을 떠난 ‘윌버 포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다. 그보다 더 먼 여행이 있다면 가슴에서 발끝으로의 여행이다.”
 
신영복 교수(성공회대학교)의 말이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발로 실천하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윌버 포스는 자신의 신념을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다. 그의 여행은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 문제의식은 그의 도덕적 양심 앞에 무릎 꿇으며 진실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영국은 완전한 기독교 국가였다. 
 

그 당시 영국은 누구나 교회에 다니고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시대였다. 하지만 흉악한 늑대가 천진난만한 양의 탈을 쓰고 있듯, 영국 귀족들은 율법과 형식을 내세운 양심을 버린 늑대와 같았다. 모든 사회법과 규제들을 자신들의 실리와 이윤에 영합시켰으며 그에 반하는 목소리는 무참히 짓밟았다. 이에 당시 가장 큰 갈등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노예제도’였다. 영국은 자신들의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노동력을 값싼 아프리카 노예들로 충당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평등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무시한 행동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태도였다.
 
귀족들은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옮기기 위해 ‘노예선’을 태웠다. 500명가량의 노예를 태우고 영국에 도착하면 살아남은 사람이 200명도 채 안됐다고 한다. 노예들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이동할 때까지 목과 팔, 다리에 쇠사슬이 채워졌고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고 배설물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인격적 대우를 당하며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윌버 포스는 더 이상 자신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깨달음 뒤에 그는 가장 먼 여행인 ‘발끝으로의 여행’의 발걸음을 뗀 것이다.
 
‘큰 변화는 작은 변화보다 쉽다’

윌버 포스는 그 여행에서 타협하거나 돌아가거나 멈추지 않는다. 어느 장애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나아간다. 그는 쉬지 않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움직였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국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걸고 거대한 권력집단을 만든 의원들에 맞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일일이 ‘청원서명’을 받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노예제도’가 얼마나 비인격적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만행인지 호소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번번이 권력집단 앞에 무너졌다. 무려 150번이나 되는 국회 논쟁에도 영국의 귀족들은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투쟁과 노력으로 조금씩 윌버 포스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꽉 막혀있던 담 사이에 비치는 가느다란 빛줄기처럼 찾아왔고 이 빛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며 결국 1785년 5월, 노예제도의 벽이 무너지며 윌버포스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당당히 통과된다.
 
진실과 게으름

윌버 포스는 자신의 도덕적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자신을 가장 섬뜩하게 느낀 때를 ‘형체없는 게으름’의 때라고 말했다.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무시해 온 것에 대한 커다란 죄의식이다.” 

우린 때때로 진실을 무시한다. 지금의 편안하고 안정된 현실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영국 귀족들은 자신의 편안하고 안정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진실과 양심은 비록 반대편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어도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귀먹은 소경처럼 등 돌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은 분명히 우리 가슴속에서 외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그리고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하지만 우리의 게으름은 그 옳고 그름과 손짓을 무시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심과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진실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윌버 포스를 통해 결국은 진실이 승리하게 하셨다.

‘노예제도’ vs '비정규직'

‘노예제도’는 영국 권력집단의 이익의 산물이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실에도 귀를 막아 버리는 모습은 지금의 ‘비정규직’문제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언제부턴가 기업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사원을 채용하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내뱉어 버린다.

 

이와 연장선상으로 많은 청년들은 자신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해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알바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이런 현대 사회가 이전의 ‘노예제도’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비인격적 폭행은 우리의 육체가 아닌 정신을 피폐하고 만들고 있다. 18세기 영국을 지나 21세기의 한국은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혹시, 그때의 귀족들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않고 있진 않은가? 아니면 게으름으로 진실이 계속해서 양심을 찌르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주저앉아 있진 않은가?
 
'윌버 포스' 없는 한국교회

한국 사회만 탓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회 역시 윌버 포스의 삶을 통해 스스로를 각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과 사랑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들이 한국교회를 주저앉게 한다. 최근 미디어와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국교회가 비판받고 있다. 물론 과장되고 거짓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즉시하고 하나님 뜻에 맞는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믿는 자들 한명 한명이 윌버 포스가 되어야 한다. 진실 앞에 귀 막거나 주저앉지 말고 그 문제에 스스로 직면하여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윌버 포스는 ‘노예제도’폐지 이후에도 끊임없이 진실과 정의를 위해 나아갔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세웠고 과다한 노동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 노동 보호법을 통과시켰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교육을 시키고 취직을 돕는 시스템을 정부가 더욱 구체적으로 실행하도록 했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문맹 퇴치에도 적극 앞장섰다.
 
작은 변화가 큰 변화보다 어렵다. 가장 섬뜩한 것은 ‘형체 없는 게으름’이다. 영화를 통해, 또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윌버 포스의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면, 우린 벌써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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