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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영웅의 부재를 가로지르는 영웅?

영화 <3:10 투 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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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재
기사입력 2008-03-26


▲     © 김상재/ 서부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맛깔스럽게 리메이크된 <3:10 투 유마>의 포스터


 

 

 

 

 

 

 

 

 

 

 

 

 

 

 

 

 

 

 

 

 

 

  
서사 활극을 제 몸으로 하고 있는 웨스턴 무비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신의 지문을 지워버리거나 영웅을 구축해 버리면 결국 필름에서는 적당히 치사한 인간들만 징그럽게 침전물로 남을까?  

우선 강제와 징벌의 무기를 다루는 웨스턴에서는 타자적일 수 있는 다중적 시선이 인상적이다. 규칙파괴자와 규칙수호자로 대칭적으로 분절되는 시선은 그림에서는 당연히 폐기되고 그 대칭선들은 도덕선의 경계를 마음대로 흐르는 뱀처럼 가로지르며 넘나드는 다층의 시각으로 흩어지며 중첩된다. 그 전 방위적인 시선이 이렇게 유려하게 성사되는 것은 단연 제작자의 심리학적 깊이의 앵글이다. 인간의 몸과 얼굴을 가득하게 균형으로 잡은 안착된 영상들은 장면들에서 쉽게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흔들리는 스릴로 관객들을 밀어 넣을 수 있는데 그 솜씨는 예리하고 능숙하다. 

쫓고 쫓기는 외형의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등장인물들 개개의 시각에서 개입, 입체의 힘으로 병렬되는 이러한 다면적 심리의 스토리들의 순열과 조합들은 웨스턴의 단순성을 이렇게 단숨에 다채로운 성찬으로 격상시키고 있는데 우선 그 경쟁력 높은 기술이 제대로 적중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인물들은 크거나 작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선악이나 권선징악의 조악한 외피에 대체되는 단역적 스턴트맨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삶과 아픔, 고민들을 존재론적 신비들을 안고 있고 그 신비의 깊이는 신비라는 개념으로 정착되는 것을 넘어 필름 내내 스토리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경계를 침범하는 차이로 발산하는 무게 높은 존재들이다. 휘파람과 기타음악, 총을 다루는 빠르기, 사실상 뻔하고 단순한 스토리를 앞에 두고도 눈을 떼지 못하는 밀도 있는 긴장과 유희를 만끽하게 하는 것은 단연 이 ‘사람냄새들’의 공감지대이다. 사실 냄새나는 이 정도의 컨셉은 어디든 쉽게 볼 수 있는 진부한 그림들이지만 영화는 이 사람 향기를 또 다른 상상력으로 자극해 주는데 그 신선함이 남다르게 맛깔스럽다.


▲     © 김상재/ 영화는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과  심리들을 능숙하게 포착, 흥미를 증폭시킨다.  



 
 
 
 
 
 
 
 
 
 
 
 
 
 
 
 
 
 
 
 
 
 
 
 
 
 
 
 
 
 
 
 
 
 
 
 
 
 
 
 
 
 
 
 
 
 

 
 
 
 
영화에서의 악당(러셀 크로우 분)은 말을 걸 줄 아는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몇 마디의 말로 여자를 호리고 사람의 내면을 흔들 수 있는 스토리의 힘을 내뿜는 내공의 인간---그리고 반면으로 그 회색적 대칭에서 보안관 부류들은 안전지대안의 언어이외에는 말을 할 줄 모른다.(성서이외의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강제된 개념 안에 언어와 일상이 폐쇄적으로 굳어있다) 인물들은 누구나가 적당히 치사하고 좀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에 밀려지는 연약한 존재들이어서 결국 누가 선이며 악당인가?하는 표면적 경계는 의미 없는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누가 어떤 우연과 사건적 강제에 어떤 방식으로 결단하고 선택되고 또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누가 어느 몸에서 옳음이 뿜어 나오고 누가 어떤 형식으로 개념의 강제를 범람하는 스토리가 생성될지 알 수 없도록 확보된 미개척의 시간과 운명, 내면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은 이 영화가 주는 매끄러운 중심매력인데 그 매력의 영상은 이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을 제법 우아하게 영화 속으로 초대하게 한다. 

어쨌든 영웅은 없다. 속사포를 쏘고 머플러를 날리는 기사는 이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로부터 매장되고 부정된다. 신화에 매인 그 세계관의 힘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없는 영웅은 결국 존재에 대한 냉소나 권태만이 남겠지만 2류 인간이라도 누구나가 권위임을 믿는 영역에서는 그 없는 공백에서 하나의 영웅은 정의롭게(?) 모두의 영웅적 자아로 분배된다. 전설적인 악당은 물론이고 빚을 갚기 위해 징그럽게 위험한 게임에 뛰어든 농부(크리스챤 베일 분), 또 다른 시선으로 발전하며 사태를 추적하는 그의 아들 윌리암, 대장을 구출하기 위한 긴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는 마초이즘의 악한 무리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결말의 우연을 향해 (주사위던지기로) 마차처럼 달려가는 빈 공간을 언제까지 빈 공터로만 남겨 둘 수가 없다. 스토리를 부정하는 분리된 처음의 스토리도 결국은 더 큰 스토리를 구성시키기 위한 더 큰 욕망의 기획이 아닌가? 

탈 해체론의 철학을 충실히 따른 이런 포스트모던적인 영화의 끝, 더 큰 이 욕망의 스토리의 종합은 당연히 전복과 익살, 역설의 규칙을(?) 따른다. 결국은 없어야 할 꼭지 점이 호출되어 설정되고 그 꼭지 점의 표면으로 밀어 올려지는 총구는 마침내 불을 뿜는데---. 

결국 신의 지문은 성서적 선악이 아니라 삶에 흔들리며 밀려가는 사람냄새---스러져야 할 악당은 선악의 경계를 넘어 그 신의 향기를 부수는 부류들로 변환된다. 악당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아름답게 장식된) 마지막 심판의 총은 누구를 향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다시 성서의 값은 역설적인 등가로 부활하고 해체된 영웅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시 화려하게 복권된다. 결국 영웅을 부정한 탈 해체는 더 큰 영웅에 대한 욕망의 절대긍정의 다른 이름이며 신앙을 냉소적으로 조소하는 것은 신앙의 권위를 고집 할 수밖에 없는 허상들의 역설적 몸짓인가? 


▲     © 김상재/ 러셀 크로우와 크리스챤 베일의 묵직하고도 세밀한 연기도 영화의 격을 높여주고 있다.   



 
 
 
 
 
 
 
 
 
 
 
 
 
 
 
 
 
 
 
 

 
어쨌든 영웅은 여전히 휘파람을 불고 다시 서부의 열차는 애잔한 구도를 그리며 휘어지는 선로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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