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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

임석순 목사, 한복협 9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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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순
기사입력 2012-09-17

 하나님은 말씀과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전력해야 할 일은 말씀과 기도이다.

1. 하나님은 말씀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은 창세 때부터 영원토록 말씀으로 일하신다. (제가 교회에서 무엇으로 일할까요? 지위가 높을수록 무엇으로 일할까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일하실 때 우리를 대언자로 세워 일하신다.(겔37:1-10)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기보다 경험(삼상4:1-11)과 세상 문화와 프로그램을 쫓아가기에 바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럴까? 세상의 성공과 같이 교회의 목적도 성공이라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시작되었던 목회가 어느 순간에 교인의 수, 개인 야망 성취에 목표를 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회의 목적이 무엇이 될 때 말씀으로 일하게 되나?
 
1) 주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님의 소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 하는 동안 우리의 목표는 당연히 예수님을 닮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목표 없이, 혹은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을 갈 때 미리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잘 세워서 가는 것과 아무런 목표 없이 그저 발 닿는 대로 가는 것은 비용이나 시간 등 효율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욱이 목표가 잘못 설정되어 원하지 않았던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면 그같은 낭비와 손실이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는 목표가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 시간은 모두 헛된 것이 될 수 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목표를 세상 것에 두고서 변화되지 않는다면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을 때는 주님을 떠나는 경우마저 있다. 물론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였을 때는 복 받기 위해서, 교제하기 위해서 등등 다른 목표를 가질 수도 있지만 신앙이 점점 자라면서 우리의 목표는 당연히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목표가 예수 닮아가는 것에 있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성공해도, 모두가 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 여기기에 절망하지 않거나 자만하지 않고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것을 닮아야 하나?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닮는 것’이다. 제자라고 하면 스승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 예수님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무슨 일이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한다면 그는 분명 제자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다 알아차릴 수도 없고 또한 그 생각대로 행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런 우리를 도와주시니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요14:26) 성령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혼자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 성경 읽는 동안에, 혹은 기도 중에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된다. 하지만 만약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 지식이 전혀 생각나지 않고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과거에 배웠던지 깨달았던지 한낱 지식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현재라는 시간으로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끌고 와서 우리의 모든 상황 가운데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고 생각나는 그 말씀이 우리를 덮고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는 평안이 찾아오고(요14:27) 하나님의 생각, 예수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그 말씀을 따라가게 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닮는 것,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다. 우리, 목회자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이전의 목표가 무엇이었든 상관없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 멸망할 자들은 땅의 것이 목표이지만 우리는 땅의 것이, 세상의 복이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미 너무 큰 복, 하늘 시민권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빌3:19,20) 평생 예수님 닮기를 소원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된다.

2)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사를 하는 것인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집안 일 하고, 직장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람의 일인가? 도대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기준은 무엇인가?
 
마태복음16장에서 이제까지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사역하셨던 주님이 갑자기(비로소) ‘장차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야 살아날 것이라(21)’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비로소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나실 때가 드디어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날을 기다렸고,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왔고, 지금까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워 했는지 베드로의 항변으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따랐는데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하니 베드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며 죽은 자까지 살리신 능력의 주님이 당신 자신은 구하지 못하고 죽는다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예수님이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구할 것이기에 베드로는 결코 그 일이 주께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고마워하며 위로해줄 법도 한데 오히려 나무라셨다.(23절) 듣기에 따라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에 주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기준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일을 하는 것이,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기준은 장소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일하면 사람의 일이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일 수도 있지만 사람의 일일 수도 있다.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로 온갖 고생을 하며 몇 십 년 일했는데도 사람의 일일 수 있다. 목회자로 평생 사역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람의 일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러한 이해를 하지 못한 베드로는 사람의 생각대로 성급하게 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해 많은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이 고난 받으실 것을 알려주셨다. 그렇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십자가가 위대한 것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결국 온 천하를 구원하는 역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고초를 당했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면 그건 영광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신다. “내가 고난과 죽음과 부끄러움 속에서도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이기에 순종하고 따라간 것처럼 너도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이나 ‘해탈’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능력과 지혜와 권위의 말씀에 완전히 굴복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부인과 동격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비록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현명하지 않은 것 같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 우리는 자신을 살릴 뿐 아니라 천하를 살리게 되는 큰 축복과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된다.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우리가 지식으로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고 계신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처럼 위대한 일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천하를 살리는 일이다. 오늘 나에게 아무리 부끄러운 일, 고통이 있어도, 그로 인해 내가 멸시를 당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멘’하면서 순종하고 갈 때 그것이 진정한 십자가이며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 된다면 반드시 말씀에 전력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마틴 로이드 목사는 1969년 필라델피아 웨스트 민스트 신학교에서 이렇게 강의 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소명과 비교할 수 없다. 가장 지고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교회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라고 강조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일하신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 그러기에 모든 일은 기도 속에서 승부가 결정되어야 한다.(출17:8-16,렘29:11-13,눅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1) 기도에 대한 오해로 인한 낙심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요청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신다.(눅18:1-8)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기도를 통해서 고치기도 하시고 또 바꾸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살리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이다. 단순히 그의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다.
 
2)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기도의 제목을 가져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있어야 한다. "주여, 북한의 통일을 위해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주소서! 주여, 이 땅을 부흥케 하소서!"라고 기도하자. 무엇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사역이다.
 
어느 날 "임 목사야,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그때 마침 창 3:9의 말씀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창 2장과 창 3장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 질문이다. 창 2:25 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창세기 3장에서는 부끄러워했다고 하였다. 창2장과 3장에서 모두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는데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비록 벗었으나 자기를 보는 대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기의 벗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 처음 파송될 때는 오직 하나님만 보였는데 나중에는 돈이 보이고 건물이 보이고 후원하는 교회가 보이고 자식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자신을 가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입을 옷을 자기가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3장에는 하나님이 가죽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셨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지금 내 눈에는 무엇이 보이며 누가 보이는가? 아담과 하와가 나뭇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창 3장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지금 하나님은 당신에게 창 2장에 머물러 있느냐 창 3장에 머물러 있느냐? 고 묻고 계신다. 자, 이제 사도바울의 복음의 여정을 생각해보자. 바울은 늘 창 2장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창 2장에서 창 3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엡 2:4의 이 "큰 사랑"이 무엇인가? 언젠가 나는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에게 전화를 한 번 했더니 너무나 감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담임목사가 전화 한 번 하는데도 이렇게 감격한다면 과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는 어떤 감격이 있는가? 엡 2:5 "죄로 인해 죽었던 나를 살리셨도다" 주님과 함께 죽었고 내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말이다. 6절 "함께 일으키사 하나님의 보좌에서 함께 앉았다"는 말씀이 귀하다. 환상 속에 천국 갔다가 온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 감격이 잊혀져 간다. 그러나 말씀 속에서 천국 이야기 하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나는 이미 그곳에 갔었다. 요 14:16 에서 소개하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 은 또 다른 예수님이시다. "사랑하는 임목사야,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다. 우리는 모두 창 2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유럽과 미국, 한국은 이미 기독교가 사라지고 있다. 탈 기독교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개인주의 때문이며 청소년 문화,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세속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주일학교 50% 청소년부 8% 청년부 3%밖에 남아있지 않다. 시 39:6 에서 다윗의 고백을 보라. 딤 6:17에는 "여호와에게만 소망을 두라"고 했다. 시 146:5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창 2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며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다. 하나님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나와 동역하신다. 내가 창세기 2장 있는 자로서 전력해야 할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여 예수 닮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창세기 3장에 있는 백성들에게 그 말씀 을 선포하는 일이고, 창세기 2장에 있는 나는 여호와의 얼굴만을 구하며 여호와를 더 사랑하게 되고, 창세기 3장에 있는 자들을 보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나와 일하기를 원하신다.(계8:1-5)
 
존 스타트 목사는 초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사단이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사용하는 보편적 전술은 3가지라고 말한다.
 
1) 유대 관원들을 통해 힘으로 교회를 억누르려고 애쓰는 것
 
2)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은 사람을 통해 위선으로 교회를 부패시키려는 것
 
3) 몇몇 다투는 과부들을 통해 지도자들이 무엇보다 집중해야 할 말씀과 기도로부터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오류와 악에 노출되게 하는 것
 
이러한 사단의 전술 앞에 쉽게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교회이지만 사단은 쉼 없이 이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정치와 문화와 외부적인 힘을 이용해 우리를 탄압하고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욕심을 위선으로 옷 입혀서 입으로는 개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부패를 조장하기도 한다. 또한 쉼 없이 일에 쫓기게 하여 집중하고 귀중하게 여겨야 할 주님과의 교제를 뒷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이러한 사단의 전술에 승리했다. 교회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력 할 때에 교회는 세상과 달라질 것이다. 아무리 사단이 온갖 간교한 전략으로 끊임없이 교회를 무너뜨리려 해도 절대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핍박과 고통, 탐욕과 욕심을 통한 삶의 부패, 그리고 중요하지 않는 것에 집중함으로 정작 말씀과 기도를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의 전략에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국교회가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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