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나흐에서 젊은 루터의 고된 훈련
독일의 중부 튜링엔의 아담한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는 루터 당시 4,500명의 아이제나흐 인구 중 400명 정도가 수도사내지는 수녀들이어서 성직자들의 서식처(Pfaffennest)로 블리워졌다. 이곳에는 루터의 외갓집이 있었고, 루터가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어느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 (Ursula Cotta) 부인은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사랑스런 섬김 속에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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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도시에는 1498년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게오르겐 교회(Georgenkirche)가 있는데 루터는 이 교회에서 약 3년 동안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 폰 카이저베르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눈을 뜬 루터는 그 이후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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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테른하임 - “루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심한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서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루터에 나타나셨다.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루터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함께 들판을 걷고 있던 루터는 폭우를 만났고,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후에 알렉시우스라고 불려짐)가 천둥 번개 속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천둥 번개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지만, 루터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락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벼락에 맞아서 죽은 한 친구의 죽음은 루터의 일생 중에서 가장 두려웠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번개가 번쩍하는 사이에 루터는 허겁지겁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루터는 그만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만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온 몸이 떨리도록 느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는 성 안나를 향해 앞으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다.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한 것은 그가 아직 주님과의 만남이 분명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1505년 7월 2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 루터의 서원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환경에 의해 일어났다.
루터는 단 한 번의 벼락 사건 때문에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다던 인생의 목표를 일순간에 수도사로 바꿔버렸다. 루터는 결코 소명감에서 비롯된 결단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의 체험은 루터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처럼 우리들도 생의 전화점이 되는 슈토테른하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슴 설레이고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현장인 슈토테른하임의 주위는 넓고 푸른 들판이었다. 이곳에 이 위대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 높이 2m의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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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2. Juli. 1505
1505년 7월 2일
“도우소서,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튀링겐에서 빛이 발하다
빛이 밝아오는 중세 암흑기 -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하다”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많은 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로 인해 타올랐던 복음의 등불은 중세기 유럽에서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중세 암흑기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진리가 완전히 가리어져 있었고, 교회들이 참된 영적 생명과 활력이 없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타락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개신교 설교자가 없던 시기이며 그 누구도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오랜 동안 종교적인 불만 및 소란함이 쌓이고 쌓였다. 중세교회의 억압은 깨트려지고 닫힌 문이 열려져야 한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행을 정화하여 철저하게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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