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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예배의날

3,000회 문화공연 관람한 성령파 목사

문화평론가 안준배 목사(세계성령중앙협의회 이사장) 파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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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영
기사입력 2016-08-01

왠지 어색해 보이는 얼굴 표정에 느릿하면서 조용한 말투, 거기에다 거동이 불편한 것처럼 보이는 걸음걸이, 그러나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다보면 연극배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가 바로 안준배 목사다.

▲ 안준배 목사     ©뉴스파워

 

세계성령중앙협의회 이사장과 대학로순복음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안 목사를 대학로 교회 겸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 단체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협의하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 물꼬가 터져서 인터뷰로 이어졌다.

 

나는 그와 대화를 통해 그가 3,000회 이상 연극,오페라 등 문화 공연을 관람했고, 문화예술공연 평론집까지 출판한 문화평론가이자 시와 수필을 쓰는 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영화감독을 꿈꾸면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었다. 성령파와 문화예술공연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40여 년을 순복음교단 목사 신분으로 문화예술 공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지내왔던 것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1년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왜 그만 두었는지 궁금했다.

 

대학 1학년 때 친구 손광호를 만나러 경북 김천 용문산기도원에 갔다가 거기에서 전도를 받고, 성령체험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서대문에 있는 순복음중앙교회에 출석을 하기 시작했어요.”

 

신앙의 불이 붙은 그는 1년 후 중앙대를 중퇴하고 무인가인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2학년 편입을 제안했다. 그러나 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사양하고 1학년으로 입학했다.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학창시절 많이 방황했다. 그런데 용문산기도원에서 만난 이원희라는 전도사가 자네는 영화감독이 되지 말고 인생감독이 되는 목사가 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면 기도응답으로 알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원희 전도사의 권유 외에도 또 하나 있다.

 

민족제단에서 기도하신다는 아주머니가 아침 밥상을 차려주면서 안준배 청년이 목사가 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집에 올라서 순복음중앙교회 청년 초청 성회에 참석했어요. 그때 조용기 목사님이 인생의 방향을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설교를 했어요 

 

당시는 술과 담배를 다 하던 때였다. 안준배 청년은 다시 용문산 춘계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김천으로 내려갔다. 나운몽 장로(용문산기도원 설립자)가 인도하는 집회를 참석했다. 그 때 방언기도가 터졌다. 그때부터 술 담배도 다 끊어지게 되었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감이었던 김진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은 그렇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1970년대 한국 교회의 대형집회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3년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가 있었는데, 1972년 종교교회에서 대학청년분과위원회 모임이 있었어요.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저를 추천을 해서 그곳에 가서 청년분과위원을 맡았어요. 그리고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에 참석했다. 당시 신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엑스플로 ’74 대회장 김준곤 목사와 훈련분과위원장 박조준 목사의 이름으로 197421, 엑스플로 ‘74 교육순장 훈련과정을 수료했다. 안 목사는 그 수료증을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

▲ 엑스플로 '74대회 교육순중 훈련 수료증     © 뉴스파워

 

민족복음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엑스플로 ‘74대회는 323419명이 56일 동안 낮에는 전도훈련을 받고, 오후에는 둘씩 짝을 지어 서울 시내에서 복음을 전했다. 또한 저녁집회와 이후에는 부흥사들이 인도하는 철야기도회로 진행이 됐다.

 

부흥사들이 인도하는 철야기도회에서 제가 여의도광장에서 김준곤 목사님처럼 대형성회를 개최하게 해주시고, 그 성회는 성령운동을 전개하는 대성회가 되어 오대양 육대주로 성령운동을 전개하는 대성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청년 신학생 안준배의 기도는 단순했지만, 큰 꿈을 품은 기도였다. 그의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992815일과 16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92세계성령화대성회 사무총장을 맡아서 대회를 진행했습니다. 18년 만에 기도응답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1989년 세계성신클럽을 조직하면서 성령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어요. 초대 회장은 김우영 목사님, 국제총무에 김국도 목사님, 저는 상임총무를 맡았어요.” 

 

197751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교회를 개척한 안 목사는 1983년에는 기독교문화예술원을 창립했다. 그는 부흥집회에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상 신현균 목사를 초청했다. 그리고 기독교문화예술원 구상을 설명했고, 신 목사는 흔쾌히 이사장을 맡아주었다. 또한 조향록 목사가 대표고문을 맡아 주었고, 안 목사는 원장을 맡았다.

 

안 목사는 이듬해인 1984년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점으로 제1회 기독교문화대상 시상식을 열었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일이었다.

 

또 하나의 기도응답이 있다.

 

한번은 영등포 영은장로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77민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그 교회에 참석했어요. 그리고 저 분들처럼 국내외를 다니면서 준비성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해 12월에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신년기도회에 참석하라는 통지문을 보고 앰버서더호텔로 찾아갔습니다. 저도 매년 앰버서더호텔에서 신년조찬기도회를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안 목사는 기도한대로 1990년부터 앰버서더호텔에서 신년기도회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국내외를 다니면서 준비성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안 목사는 1974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42년 동안 연극, 오페라, 창극, 뮤지컬 공연작품들을 3,000여 회 이상을 관람했다. 관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꼭 감상문을 썼다.

▲ 안준배 목사가 자신이 쓴 문화예술 평론집을 펼쳐서 읽고 있다.     ©뉴스파워

 

1970년대 공연을 보고 현장을 보고 쓴 글을 하나로 묶어서 쎄실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문화평론집을 출판했다.

 

안 목사는 자신이 하는 행사에는 문화적 행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974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제작해서 서울 충무로 5가에 있던 연극인회관 소극장에서 일주일간 공연을 했어요. 당시 제작비 적자를 보기도 했지요. 그 당시 변두리 집값이 400~500만원할 때 70~80만원의 빚을 졌어요.”

 

안 목사는 네오스선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선교를 하려고 외침과 속삭임팀을 만들어 지저스 락인 ‘Why Me' 등을 교회들에서 공연했다. 이와 함께 한국예수전도단을 창립한 오대원 선교사, 제콤 등과 함께 교회, 숭의음악관 등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예수 페스티벌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하용조 전도사와 곽규석 집사가 연예인교회를 시작할 때였다.

 

198910월에는 너는 내 반석이니라는 연극을 직접 제작해서 세종문화관에서 막을 올리기도 했다.

 

문화선교의 뜻을 펼쳐가고 있던 때 성공회신학교를 다녔어요. 그때 대천덕 신부(예수원 설립자)가 강론을 위해 학교를 방문했지요. 당시 이재정 신부가 안 전도사는 순복음 타입이 아니다. 성공회로 와라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대천덕 신부님에게 상의를 했어요.‘“안 형제가 속한 교단에서 문화선교를 반대하는가라고 물어요. 그래서 아니오라고 대답하자 현재 속한 교단에서 계속하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안 목사는 2003년 기하성 50주년 희년대회 때는 사무총장을 맡아 월드컵경기장과 영산아트홀에서 전도서로 전도곡이라는 국악곡을 작사해서 올렸다. 작곡은 서울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문성모 목사가 맡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안 목사는 경기민요, 판소리, 창극에 심취했다. 1999년에는 민요풍의 작사와 국악찬송가를 만들었다. 안숙선 명창의 창극 여러 편을 평론하기도 했다. 또 문인들의 연극 천당 간 사나이를 기획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연세중앙교회에서 막을 올린 오페라타 길선주의 대본 작사를 하고 기획, 제작을 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중퇴는 했지만 문화예술활동을 끊임없이 해온 것이다. 안 목사는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희곡을 전공, <극작가 이현화 희곡에 나타난 형식적 특성과 현실 반영성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문화예술평론집 쎄실로 가는 길, 예술 그리고 예수, 예술무대, 빛과 어둠등을 출판했다. 특히 대한기독교서회에 출판한 예술무대, 빛과 어둠은 재판을 찍을 정도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안 목사의 사역을 정리하면 기독교문화와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리가 기독교를 주제로 하는 공연에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감동이 연기자나 작품을 통해서 임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동이 있습니다.”

 

안 목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오페라는 베르디의 라부꼬’, 연극은 조우의 내우를 꼽았다. 또한 극작가 차범석의 산불도 명연극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기독교 경계를 넘어서 문화예술 분야에 활발하게 활동한 안 목사는 신학생 때 진보의 거목 강원룡 목사가 담임하던 경동교회를 2년 동안 출석했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나든 셈이다. 지금 하고 있는 성령사역과 문화사역도 경계가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오감을 열어 자유의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안준배 목사의 느린 말투에서, 외모에서 목회자의 모습과 희극인의 모습이 느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 안준배 목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단체와 교회가 들어서 있는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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