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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재능을 허비한 사람, 카사노바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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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기사입력 2017-01-06

  

베니스에 도착하는 순간 비릿한 냄새로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특히 이곳은 그 유명한 바다의 도시로 천년동안 해상 무역으로 지중해의 돈을 거머쥐었던 곳이다. 가면무도회가 유명하고 자신을 카멜리온처럼 변장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에 탐닉했던 카사노바(Casanova Giovani Giacomo 1725-1798)의 고향이기도 하다.

▲ 1720에 오픈한 플로리안 카페 앞에서 한평우 목사     © 뉴스파워

 

 

세상은 다양한 색깔로 자신을 나타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카사노바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는 주간지나 삼류 소설에 가장 많이 소개되는 인사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상한 얘기 보다는 성적 흥미를 자아내는 기사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스포츠 신문의 한 귀퉁이에 양념처럼 실리는 연예계 기사처럼.

 

그는 이곳에서 탄생의 첫 울음을 터뜨림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렸다. 항구 도시가 흔히 그렇듯, 무역으로 부를 창출하며 흥청거렸던 천년의 도시 베니스에서 가난한 배우의 아들로 출생했다. 부모는 한 살 때 그를 할머니 손에 맡기고 파리로 떠났다.대체적으로 별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투영한다고 보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의 허영과 겉치레로 치장한 가면의 삶을 배웠을 것이다. 베니스 상인으로 유명한 이들의 속이고 약삭빠른 장삿술을 터득했을 것이다.

 

카사노바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 이름의 뜻이 라틴어로 <꽃다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는 평균적 이태리 사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190cm의 큰 신장에, 아주 잘생긴 외모와 신사적인 에티켓을 구사하는 젠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뉴욕(뉴욕은 이태리 계가 3백만이 거주한다고 함)에서는 이웃집에 이태리 사람이 살면 부인을 조심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태리 사람은 이런 부분에서 천재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주한 이태리 대사로 간 사람치고, 이혼하고 한국인 비서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수년 전, 이태리 수상 베르루스코니(Berlusconi)는 두 번째 부인과 이혼 신청을 한 상황에서 G-8 모임이 로마에서 열리자, 외국 사절 부인들을 자신이 임명한 30대 모델 출신 여성 장관(언론에서는 애인으로 보도됨)으로 하여금 맞이하도록 했다(아마도 이런 일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지 싶다). 전혀 스스럼없이.

 

카사노바는 자신의 출중한 외모와 달변(이태리 사람들은 모두 달변가다)을 이용하여 사교계를 주름 잡았다고 한다. 사교계를 주름 잡았을 뿐 아니라 사교계의 꽃이었다고 한다. 자신과 함께 하려는 여인들이 언제나 줄을 설 정도로 말이다. 그를 거쳐 간 여인들이 무려 119(어떤 이는 162)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7살에 파도바대학의 법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또한 연극배우, 도박꾼, 사업가, 외교관, 시인, 소설가요, 철학자, 외교관, 바이올리니스트요, 한때는 성직자를 하기도 했다. 의학, 화학, 수학, 통계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무려 40여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 많은 재능이 있을까 싶다. 그는 파리로 가서는 궁중의 재원조달이 부족하여 고민하는 왕을 위해 최초로 복권을 만들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고, 그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세계 최초로 파리에서 복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유명 인사들과 교분을 가졌는데, 보헤미아로 도망가서는 볼테르, 괴테, 모차르트 등과 사귐을 가졌고, 그곳에 있을 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번역했다. 또는 입방체에 관한 수학적 논문을 쓰기도 했다.

 

1791년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프라하에서 초연하기 전날, 가사를 마감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이태리어와 라틴어, 그리스어, 불어,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지배 계급의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자는 법을 요리하는 데는 천재적 능력이 있다. 사람은 어느 시대나 너무 튀게 되면 질시를 받게 되어 있다.

▲ 오른쪽 길과 연결된 궁과 감옥     ©뉴스파워

 

 

결국 카사노바는 이단적인 마법으로 이성을 유혹한다는 것과 무신론적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 높은 두칼레 궁(Palazzo Ducale)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비상한 그는 1년 만에 기적처럼 그 감옥을 탈출 했다.역사적으로 그 감옥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고 한다.그는 감옥에서 탈출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들이 재판 없이 나를 가두었기에 나도 재판 없이 이곳을 나간다.”

 

정상적인 재판을 위해서는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증인으로 나서는 여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증도 많았을 텐 데, 이런 부분이 그의 진가(?) 일지도 모르고. 한참 선배인 로마의 영웅 시저도 그랬다는데.

 

그는 베니스를 급히 도망치면서도, 마르코 광장에 있는 이태리에서 최초로 문을 연 풀로리안 카페(Flolian Caffe 1720년 시작, 괴테나, 바그너 등 유명한 사람들이 방문함)에 들어가 에스프레소(Espresso) 한잔을 마셨다. 과연 이태리 사람다운 면모를 마지막 순간에도 보였다.

 

그리고 유유히 보헤미야(지금의 체코)로 도망쳤다. 거기서 부유한 백작 발트 슈타인의 사서로 들어가 남은 생애를 쓸쓸히 보내야 했다. 뒤늦게 철든 사람처럼,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전능하신 신과 나의 죽음에 대한 모든 증인들이여,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인으로 죽는다.”

 

그 많은 재능을 좋은데 집중하였더라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을까 싶다. 최후를 맞이할 때도 외지에서 고독하지 않았을 테고.

 

카사노바의 자유분방한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평범하지만 바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아마 카사노바도 죽음의 면전에서 깊은 회한을 가졌을 터!

사람은 누구나 카사노바 같은 본능이 있음을 알아 자신을 잘 갈무리해야 되지 싶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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