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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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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기사입력 2018-07-05

인간은 누구나 자유와 해방이라는 완전한 삶을 꿈꾼다. 우리는 이것을 열반이나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죽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이생에서도 성취할 있는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다과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1.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일까?

 

기독교 신앙인들의 입장에서 열반이라는 용어는 너무나 생소하여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의한다면, 열반은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삶은 근심과 불안, 번뇌와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열반은 이러한 현실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있다.

 

어쩌면 열반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구원이라고 있다. 이제부터 사성제의 번째 원리인 괴로움을 없앨 있는 거룩한 진리, 열반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하여 괴로움의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이기적인 탐욕이나 갈애(갈망)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때에 열반은 바로 갈애나 욕망의 종식이라 말할 있다. 이를 쉽게 설명한다면, 현실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무병장수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나 우리가 사후세계를 통해서라도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구에서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열반에 관한 석가의 생각은 이렇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란 이와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없이 해탈하는 것이다.[1]

 

<숫타니파타> 경전에서는 열반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것이나 들은 것이나 감지한 것이 어떠한 것이든 모든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성자는 짐을 내려놓아 완전히 해탈하였습니다.

그는 분별이 없고, 혐오가 없고,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Stn. 914)

 

열반은 해탈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라고 있다. 이는 해탈이 세상의 속박과 번뇌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해탈은 현세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다가오는 불안이나 두려움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누리는 것이 바로 열반이요 해탈이다. 그렇다. 해탈은 험한 세상 속에서 누릴 있는 마음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내적인 평안을 말이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석가에게 열반에 관하여 질문을 하게 된다, 

 

그대 태양족의 후예이신 위대한 선인께 멀리 여윔과 적멸의 경지에 대해서 여쭙니다. 수행승은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에 듭니까? (Stn. 915)

 

이에 석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수행승은 안으로 평안해야 합니다. 밖에서 평안을 찾아서는 됩니다.

안으로 평안하게 사람에게 어찌 취하는 것이 없는데, 버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Stn. 919)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있을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갈애, 간절한 욕망이나 욕심을 부수어 버리면 된다.  이는 우리가 부귀영화나 무병장수를 누리고자 하는 현세적인 욕망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에도 영원히 존속하고자 하는 내세적인 소망조차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안에 있는 내적인 욕망, 특별히 성적인 욕구조차도 없애 버리는 것이 마음이 평안해지는 최상의 비결인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이여, 조건적이든 무조건적이든 욕망을 여의는 것이 최상이다. 그것이 자만의 분쇄이며, 갈증의 파괴이며, 집착의 뿌리를 뽑음이며, 윤회의 자름이며,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이다.[2]

 

결국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이생의 삶을 평안과 기쁨의 삶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은 바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이기적인 탐욕이나 갈애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탐욕과 갈애를 진정으로 몰아낸다면 때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애란 무엇인가? 갈애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갖는 감수(느낌)가질 때에 발생하는 목마름이나 갈증을 말한다. 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촉하고 나서 갖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나 느낌으로 인해 발생되어지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마음이라고 말할 있다그래서 석가는 라다여, 갈애가 부수어진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3] 석가는 해탈한 삶을 살기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눈으로 탐내지 말아야 하고, 저속한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해야 하고, 맛에 탐착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괴로운 일을 만나 고통을 겪을지라도, 수행승은 어떠한 경우이든 비탄에 빠져서는 되고, 존재에 탐착해서도 되고, 두려운 것을 만나도 전율해서는 됩니다.

음식이나 음료나 먹을 만한 것이나 또는 옷을 얻더라도 쌓아두어서는 되며, 그것들을 얻을 없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해서도 됩니다.

선정에 드는 님은 방황해서는 되며 나쁜 일을 삼가고 방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조용히 앉을 자리와 누울 자리가 마련된 곳에서 수행승은 지내야 합니다.

잠을 많이 자서는 됩니다. 부지런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태와 환상과 웃음과 유희와 성적교섭과 거기에 필요한 장식물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Stn. 922-26) 

 

석가가 말하는 해탈의 삶은 욕심을 버리고 하루 하루를 걱정없이 사는 것이라고 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루 하루를 걱정없이 사는 '떠돌이 생활'이 바로 해탈한 자의 삶인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병을 만나고, 굶주림에 처해도 참아내고 추위와 무더위도 참아내야 하리라.

여러가지로 없이 그러한 것들을 만나더라도 정진하며 굳세게 노력해야한다. (Stn. 966)  

무엇을 먹을까?어디서 먹을까?, 잠을 실로 잤다, 오늘 어디서 것인가?

없이 유행하는 학인은, 이러한 비탄을 야기하는 걱정을 제거해야한다. (Stn. 970)

 

이러한 해탈한 자의 삶에 대하여 김사업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편하면 편한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살며, 죽음이 오면 죽는 것이다. 그날 그날이 좋고 나쁨을 초월한, 매일매일이 그날 밖에 없는 유일한 , 절대적인 , 최고의 날이다. 이렇게 사는 자에겐 순간이 모든 것이므로 순간이 영원이다. 순간순간의 장면은 편하거나 아프거나 하는 무상의 연속이지만 속에서 그는 영원을 산다. 어떻게 이렇게 있을까? 진리인 연기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인연이 되어 생겨날 때는 100퍼센트 생겨나고, 인연이 다되어 소멸할 때는 100퍼센트 소멸한다. 인연의 세계에서 이것말고 무엇이 있는가? 살아갈 때는 100퍼센트 살고 죽을 때는 100퍼센트 죽는다. 결코 미진함과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4]

 

과연 해탈한 자들, 아라한들의 일상적인 삶은 어떨까? 과연 그들의 삶은 일반인들과 어떻게 다를까? 이러한 궁금증은 피할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김사업스님은 대주선사의 일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과 같이 연기그대로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당나라때의 대주혜해선사의 일화에서 있다. 원율사라는 스님이 대주선사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다네.

어떻게 노력하십니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네.

거야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람들도 스님처럼 도를 닦는다고 있겠군요?

그렇지 않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먹을오로지 밥만 먹지않고 이것저것 요구가 많고, 잠잘잠만 자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그게 나와 다른 까닭이야.

율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5]

 

도대체 대주선사가 말하는 닦기 위한 노력으로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김사업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주선사와 같은 선승은 위의 말로써 보여주는 경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먹을아무런 잡념없이 밥만 먹지 않는다. 어제보다 반찬이 적거나 맛이 없으면 투정을 부린다. 친구가 던진 자존심 상하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을 때는 녀석 때문에 맛이 떨어졌다고 울분을 터뜨린다. 그는 친구의 한마디를 곱씹지 밥을 먹지 않는다. 학교 다닐때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지던 녀석이 사회에 나가 성공했다고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밥알을 씹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씹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만 두어야생각을 놓지못한다. 어떻게 하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 , 이러면 안돼. 잠을 자야 건강하지. 자자, . 그런데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거야? 짜증난다.

잠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수면제를 찾고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

대주선사는 먹을잡념없이 100퍼센트 밥만 먹는다. 잠을 때는 천하를 잊고 100퍼센트 잠만 잔다. 대주선사의 경지라면 연구할 때는 100퍼센트 연구에만 몰두하고, 운동할 때는 100퍼센트 운동에만 몰두한다. 물이 컵에 들어가면 100퍼센트 모양을 하듯이, 순간은 순간대로 100퍼센트 살고 다음 순간은 다음 순간대로 100퍼센트 산다. 그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진리대로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6]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석가가 말하는 해탈의 삶이 예수가 말하는 성도들의 삶과도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자라도 더할 있겠느냐 28.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32.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날의 괴로움은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 25-34)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는 제자들이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여 아무 것도 없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한다,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태복음 10:9-10)

 

그렇다면 석가가 가르치는 해탈의 삶과 예수가 가르치는 복음을 전하는 삶이 무엇이 다를까? 이상적인 삶이라는 목표와 지향점은 같으나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세상적인 것들에 애착을 갖지 않고 아무런 소유를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유사하고, 하루하루를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간다는 면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둘의 가르침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도 목적과 방법이 다르다고 있을 것이다.

 

석가는 괴로움이 없는 삶을 성취하기 위하여 누구의 도움도 거부하면서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반면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하늘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의 평안을 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구원을 받도록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말한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태복음 10:11-13)

 

과연 세상의 고통과 번뇌에서 우리 스스로 마음을 지키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하늘의 평안이 필요가 없을까?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선물로 받지 않아도 이 세상의 험한 풍파를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에서도 자유 함을 얻을 수 있을까? 석가는 초월적인 평안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스스로 자위하여 그 모든 번뇌에서 평정심을 스스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은 불안한 존재이고 하늘의 기쁨과 평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1]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77쪽에서간접인용.

[2]Ibid.에서간접인용.

[3]Ibid.

[4]인문학을좋아하는사람들을위한불교수업, 35.

[5] Ibid, 41-42.

[6] Ibid,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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