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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영화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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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기사입력 2005-10-08

 


고거이 유치한 설정 아니겠슴메?
 
얼핏 보면 삼류 멜로드라마다. “너는 내 운명”이란 영화는. 제목부터 식상하다. 일명 뽕짝이라 불리우는 시골 오일장 시장판 아싸라비아 유치짬뽕 메들리 노래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제목같다. 너는 내 운명. 당신 없이는 못살아, 너 없이는 못살아, 너는 내 우-훈명, 뭐 그렇게 가녀리게 올라가다 숨이 콱 막혀 꺽어지고 넘어지는 그런 곡조에 실린 가사같다. 너는 내 운명. 조금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영화 '너는 내 운명'의 한 장면     © 뉴스파워

내용을 요약하자면 짧다. 왜냐하면 스토리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결혼 정년을 훨씬 넘긴 농촌 노총각이 읍내 순정 다방에 새로운 레지아가씨 은하에게 반해서 구애를 하게 되는데, 결혼까지 성공은 했으나 그만 전 애인이 나타나서 갈등이 증폭되고, 게다가 아내가 에이즈 감염자라는 사실이 신문에 공개되면서 법정에 서고, 급기야 아내는 감옥에, 남편은 청산가리를 먹고 성대를 상하는 정도로 살아나면서 다시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는 해피엔딩 스토리. 신파조로 돌릴려면 얼마든지 웃고 울릴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관객들로부터 저질아냐! 라는 핀잔도 들을 뻔했다. 결국 감독의 실력에 따라 그런 아슬아슬한 야유와 환호의 8부 능선을 탈 뻔한 스토리다. 만약 에로영화 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손에 잡았다면 즐펀한 어우동식, 아니 변강쇠판 에로영화도 될 뻔했다. 이유야 뻔하다. 이상 야릇한 섹시미를 풍기는 티켓다방 아가씨, 그리고 발정난 망아지모양 장가 가지 못해 야단난 노총각. 에로물의 더 없이 좋은 소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변00감독은 리얼리즘으로 접근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는 바탕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엉뚱한 상상은 거부합니다.
 
성중(황정민 扮)은 우직하다. 친구의 소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노총각이다. 자기 소도 한 마리 있다. 순박한 어머니에 대처에 가서 자리잡은 형이 있다. 형에게 동생은 걱정거리다. 장가를 가야하는데. 생각 끝에 성중은 베트남인지 필리핀인지 다녀오지만 실패하고 계약금을 떼일 판이다. 하지만 성중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계약금의 일부는 돌려줘야 한다며 따진다. 그런 우직한 친구다. 삼노(三老)당 일원이다. 읍내에 마지막 남은 세 명의 노총각이 만든 모임이란 뜻이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난다. 읍내 순정 다방에 새 아가씨가 들어온 것이다. 이름하여 은하(전도연 扮).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변에서 이 꽃중의 꽃을 발견하고 석중은 인생이 뒤바뀐다. 너는 내 운명이 말없는 시선 속에서 이미 불꽃을 튀긴 것이다. 은하를 포함한 다방 아가씨들이 간 곳은 보건소. 정기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초반전, 아무런 갈등도, 극적인 전개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멜로 속에 사회학이!
 
그렇게 평범한 스토리로 매너리즘에 떨어질 뻔한 멜로 드라마에 예리한 풍경이 앵글에 잡힌다. 사회가 도시화를 가속화 하면서 낳은 미아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사회적 차별이 그것이다. 이를 조금 뜯어보기 위해 우리는 사회학이라는 안경을 빌려 써야 할 것같다.
 
농촌사회학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성중을 대변인으로 하는 농촌사회의 풍경이 그것이다. 성중은 전형적인 농민이다. 그는 읍내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생각지도 않은 농사꾼이다. 아마 조금 지나면 영농후계자란 직함도 얻을 법한 일벌레 농군이다. 하지만 도시화는 농촌을 소외지역으로 밀어내게 된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일자리도, 소득도 변변치 않다. 교육 환경도 그렇다. 읍 단위 생활이란 게 문화적으로 소외 지역이다보니 어느 생각있는 처자가 농촌으로 시집가려고 하겠는가. 더구나 요즘은 필(feel)의 시대가 아닌가. 웬만한 유행과 감각은 매스미디어로 숙달된 처자들이 농촌 총각의 우직한 감정 표현과 생활 방식을 두 손 들고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농촌 총각들은 여러 가지 환경적 장애와 맞닿는다. 그것을 소외로 이야기하자면, 농촌은 도시에 비해, 소득 소외, 감각 소외, 문화 소외, 생활 소외 지역이 된다. 결국 농촌 총각이 장가 든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워진 사회상이 현재의 모습이다.
 
또 다른 풍경이 사회학의 시야에 들어온다. 소외 여성들이다. 언제부터인지 전국적으로 모텔이 건설(?)되고, 묻지마 사랑이란 단어들이 귀에 들리더니 티케다방이란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모르긴해도 티켓다방류의 사랑방식은 그전부터 은밀히 진행되어 오고 있었던 듯싶다. 성풍속도도 많이 달라졌지만 도시의 화려한 정글에서 밀려나거나, 개인적인 사연을 갖고 있거나 빚더미에 도망친 ‘아가씨’들이 티켓다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존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도시라는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소외 지역의 여성들이기에 심각한 사회성을 갖는다. 그들이 2기통 오토바이를 일렬로 몰며 낭만적인 시골 가로수 길을 달려갈 때 그 그림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것은 거기에 삶의 처절한 애환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사회가 어떻게 끌어안고 해결해야 할지 아직도 공론화가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내 운명”이란 영화는 바로 두 개의 소외 지역이 첨예한 주제로 만난다는 데에 패러독스가 숨어있다. 한 마디로 불가능한 사랑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관객들을 불안하게 만들다는 것이다. 우직하지만 돈없는, 그래서 매력없어 보이는 농촌 총각과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읍내 순정다방까지 흘러온 티켓다방 아가씨와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은 애초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사랑도 뭐 수준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짚신도 짝이 있고, 천생연분이란 게 있기는 해 보이지만 사회학적으로 도저히 궁합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농촌과 도시, 순박 청년과 티켓다방 아가씨, 결코 아니올씨다인 것이다. 그래서 성중의 어머니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반대했고, 성중의 형도 좌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형이 동생에 대해 부라린 눈빛을 보라. 궁합은 커녕 사회학적으로 두 사람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인물들이란 게 확인된다.




접입가경이라 
 
그런데 골짜기에 들어갈수록 기막히다 했던가. 스토리는 잠시 행복동에 들르다 그만 절벽으로 고꾸라진다. 아니면 행복은 불행의 서막이라 했던가. 그래서 행복할 때 조금하라고 옛말에 교훈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잠시 행복했다. 성중은 땀흘려 일하면서도 힘들 줄 몰랐고, 성중모(母)는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두고 공연히 심술을 부렸다고 후회한다. 은하는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나날이라고 여기며 새 삶을 시작한다. 스토리적으로 보면 여기서 끝이고 더 이상 재미있을 굴곡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관객은 불안하다. 이렇게 가면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닌가. 진짜 삼류 멜로같은 너는 내 우훈-명이란 말인가. 접입가경은 이때부터다.
 
은하의 옛애인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은 파경으로 치닫는다. 성중의 본심을 알고 있는 은하는 남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떠난다. 옛애인은 성중에게 돈을 요구하며 포기각서를 써주지만 집요하게 은하를 뒤쫓는다. 이야기는 성중의 파멸을 크로즈업 시킨다. 영화는 한 순박한 농촌 총각의 파멸이야기로 가는 것인가?. 그는 은하를 찾아 다니다 폐인이 되다시피한다.
 
한편 은하의 옛애인은 거머리처럼 은하를 착취한다. 은하는 에이즈 감염 성매매여인이라는 매스컴의 집중 보도를 받으며 감호소에 갇히고, 성중과 은하가 살던 마을사람들, 남녀노소 구별없이, 군인들까지도 에이즈감염여부를 조사받는다. 평온했던 동네가 갑자기 이름도 낯선 에이즈라는 먹구름에 휩싸이고 성중의 집안은 이른다 저주의 중심부에 몰리게 된다. 어머니도, 형도, 그래서 우리가 결혼은 안된다고 그랬지 않느냐며 성중을 몰아부친다.
 
성중은 지치지 않은 인내로 사랑을 찾아헤메인다. 은하는 면회를 신청한 성중을 만나주지 않는다. 자신을 잊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중은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은하는 성중에게 너는 내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는 성중은 좌절의 막다른 골목에서 독약을 마신다. 죽음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저항하려 한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도 명분은 선다. 만약 그렇게 끝났다면 한 농촌 총각과 다방아가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종말, 이렇게 홍보팀은 카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클라이맥스가 오지 않았다고 암시한다. 감독이 숨겨놓은 빅카드가 있다. 관객은 어디서 멜로드라마가 제공하는 가장 귀한 선물인 눈물을 흘려야할지 어리둥절하다. 영화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 극적인 장면이 숨겨진 것인지. 어디에 앵글을 맞춰야 하는 것인가.




변방에서 불길이
 
모두가 지쳐있다. 성중은 독약을 마셨지만 다행히 생명은 부지했다. 어머니는 다시 한많은 농촌의 어미가 되어 먼산을 바라본다. 성중이 누워있는 병원은 변방이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안달하던 농촌 총각이 천신만고 끝에 이룬 사랑을 잃고 좌절한 공간이다. 성중의 집은 썰렁하다. 은하와 결혼했던 그 신혼의 달콤한 행복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변방이다. 성중의 마을 사람들, 그들은 시골촌놈이 무슨 다방아가씨와 결혼하냐며 비웃고, 결국 에이즈라는 해괴망측한 병을 퍼뜨렸다고 고개를 돌리는 인심의 변방으로 돌변한다. 어느 한 구석 사람의 살갗은 따스함이 배어있지 않다. 총체적 절망의 공간이 성중과 은하의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믿으려하는 순간이다. 소외된 놈들은 사랑도 안돼!라는 자조적인 비웃음이 들리는 듯한 변방이다.
 
형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교도소에 찾아가 성중을 담념하라고 선언한다. 관계의 단절이다. 변방에서는 관계도 계속될 수 없다. 은하도 마지막으로 한번 성중을 만나기로 다짐한다. 자신을 잊으라는 뜻이다. 벽에 붙은 사진도 떼고 마음도 정리한다. 그러나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성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니까. 은하는 자기가 죄값을 치룰려면 성중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처음에 오해했던 것처럼 삼류사랑이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사랑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 사랑을 불타게 하고 있었다.
 
상중과 은하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소, 그곳도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교도소였다. 은하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상중에게 냉랭하게 대한다. 정말 냉혈적인 아내다. 아니 사랑한다면 저렇게 독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은하의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너무 사랑하기에, 불행한 자기로 인해 더 이상 성중이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지극한 사랑의 문법이었다. 성중은 말이 없다. 애타면서 눈물만 흘린다. 은하는 면회시간이 끝났다며 돌아가려고 한다. 성중의 북받치는 울음, 그는 면회대 위에 뛰어올라 스피커를 뜯어낸다. 그가 키우고 있는 소같은 힘으로 국가 기물을 파손한다. 성중은 그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집행하는 국가 기관의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못한다. 사법부의 소유물을 무단 파손하고 있다는 의식도 갖지 못한다. 다만 그가 키우고 있는 소같은 목소리로, 쉰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그 때 울음을 삼키며 냉정한 연극을 연기하던 은하가 돌아선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우리 둘 사이의 사랑에 신비감이 젖어온 것이다. “목소리가 왜 그래?” 그 때 어두운 먹구름에 쌓였던 그간의 비련의 감정이 한 숨에 터져나온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사랑했었다. 소외도, 변방도, 옛애인의 질투도, 읍네 사람들의 외면도, 심지어 에이즈까지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
 
관객은 그제서야 독약 먹은 성중이, 독약을 먹기까지 사랑에 몸바쳤던 성중이 성대를 상했다는 것을 유추해낸다. 눈물샘이 드디어 북받치는 감정을 타고 터져나온다. 멜로가 유치한 사랑장난에서 그치지 않고 순애보로 비상하는 순간이다.
 
그들은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손끝에서 번득이는 따스한 불빛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를 갈망한다. 아마 살면서 그렇게도 하찮아 보이는 촉각에 서로를 확인하기는 처음일 것이다.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하찮은 부딪침들이 지나쳤을까. 그러나 그 순간 어느 누구도 사랑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일상은 그렇게 거대하여 사소한 촉각도 사랑의 의미로 느끼지 못하게 했었다. 이제 간수들이 막아서도 어떤 벽이 가로막아도 그들은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맞닿은 서로의 손매디. 사랑이 손끝을 타고 어깨죽지로 심장으로 가슴으로 영혼으로 파고든다. 모든 오해가, 미움이, 좌절과 절망이 무릎 꿇는다. 진정한 사랑 앞에.




그리고 흙에서
 
영화는 행복한 상중과 은하를 보여준다. 겨울 추위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그들은 환하게 웃는다. 교도소를 출감하는 은하를 마중 나온 상중, 앞으로는 행복만이 있을 뿐이라는 암시가 배어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이 가능했을까. 스토리는 중간중간 지뢰같은 폭발물을 설치했었다. 한번 터지면 스토리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서거나 플롯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애초에 은하가 상중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면, 상중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고 아주 드러누워 버렸다면, 형이 죽기를 각오하고 말렸다면, 옛애인이 나타나 은하를 다시 데리고 가버렸다면, 에이즈 검사를 받던 읍네 사람들이 상중의 집에서 집단 시위라도 했더라면, 상중이 독약을 먹었을 때 죽었더라면, 은하가 상중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쉰 목소리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이 이야기는 지뢰의 희생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사에서는 그런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발생하니까. 하지만 이 위험한 지뢰들은 다행히 터지지 않았다. 우연이었을까. 아니, 왜 터지지 않았을까. 사건을 한번에 말아먹고 촌티나는 사랑타령을 끝장 낼 수 있는 악마의 힘이 왜 폭발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흙, 흙의 힘이었다. 모든 것은 흙 때문에 가능했다.
 
“너는 내 운명”은 그래서 남자주인공에게 다시 질문한다. 어떻게 그런 사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 시대의 사랑법에는 어울리지 않는 순정의 사랑을 어떻게 바칠 수 있었습니까? 성중은 말없이 웃는다. 눈 위에서 웃는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지요. 모두가 나를 탄생시키고 자라게 해주고 길러준 흙의 힘 때문이지요. 흙은 속이지 않잖아요! 흙은 두 말 하지 않잖아요! 흙은 바로 우리 삶의 운명이잖아요! “너는 내 운명”이 신파조 같다구요.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바로 흙의 노래에요. 우리가 흙이라는 것, 흙에서 온 우리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면 그런 사랑은 자연스레 되는 거에요. 이해가 잘 안된다구요. 아스팔트 위로 너무 나갔나 보군요. 흙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면 눈물도 감동도 사랑도 다시 찾게 될 거에요. 비록 상처는 남아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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