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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군’과 우리의 ‘이군들’을 위해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NCCK 사건과 신학/성탄, 성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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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환
기사입력 2020-01-01


2019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대림절 맞이하기-나의 ‘이군’과 우리의 ‘이군들’을 위해

▲ 성탄절     ©뉴스파워

 

내 자식의 이름으로 법이라도 만들어 다른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이 그 억울한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 여기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이들 발아래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87년 이후 우리 세대가 간절히 열망한 민주화의 결과가 고작 이 정도에 밖에 안 된다는 현실에 좌절감과 모멸감이 들었다.

심지어 ‘86세대는 가라!’며 과거 민주화 세대를 기득권층처럼 몰아세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역력하니 벌서 퇴물취급을 받는가 싶어 억울해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비판이 주로 젊은 남성들로부터 제기된다는 보도를 접하며, 적어도 ‘86’은 명분이 먼저였는데 지금은 실리가 먼저인가 반문하게 되기도 했다. 하긴 <90년이 온다>의 저자가 82년생이라는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2019년 한국사회는 ‘86’의 ‘민주’에서 오늘 청춘들의 ‘공정’으로 전환되는 격동을 보여주었다. 세대의 교체라고까지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청춘들이 과거 ‘민주’의 투쟁이 권리가 되고 나아가 기득권이 되었다 비판하고, 그들의 선배들이 만들어 온 결과물에 낙제점을 부과한다 한들 별 수 없을 만큼 오늘의 비루한 ‘민주’의 현실 앞에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민주’는 ‘공정’하지 못했던 것일까.

친애하는 이군의 중도하차를 보며

현실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 해도, 동시대를 살아 온 이들이 그 연대적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호출됐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뜨거운 대학시절 이후 신학의 길을 걸었고, 지금은 현실정치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그 정치의 도덕적 토대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이라 여겨 신앙에 소망을 두고 학생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여정을 가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현실정치로부터 벗어난 진공지대는 아니다. 내가 선택한 여기에서도 현실정치의 영향력은 여지없이 파고들어 그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요구해왔다. 실천과 현장에 답이 있다며 현실로부터 고립되거나 이격된 상태로 종교집단화되지 말아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강력히 피력해왔는데 어느새 나 또한 요즘 유행하는 말로 “Latte is horse(나 때는 말이야~)”를 연신 남발하고 있으니 나의 말이 잔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라 자성해 본다.

최근 교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현실정치의 공간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았던 우리 안의 격정적 토론과 대결은 공동체 내부에 깊은 내상을 남겼다. 이곳에서도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며 변화를 갈망하는 기도가 있었다. 학생들은 그때 우리들처럼 시대의 요청에 격렬히 반응하며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사회적 구호를 “이것이 교회인가?”라는 신앙의 구호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을 기억했었다.

그러나 많은 선배들의 지지와 선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를 떠나가는 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불과 1-2년 사이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체가, 공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며 스스로 공동체를 떠나는 이들을 보는 착잡한 마음, 오늘 광장에서 ‘86’에게 ‘공정’을 요구하는 청춘들의 얼굴들이 겹쳐지며 이 시대의 불화를 어찌 해명해야 할지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급기야 이군이 자신이 몸담았던 학교공동체를 떠나 다른 영역에서 소망을 찾아보겠다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선생으로서 아니 이 길의 선배로서 그 발걸음을 막아서지도 못한 이유는, 어쩌면 그리 보내주는 것이 차라리 이 시대 청춘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며 그 고통을 전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나 이 또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지식인의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군과는 면식이 없다. 그래도 그가 남긴 고별사에 담긴 아픈 마음이 그대로 전이되어 온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 그 간격을 메울 수 없으리라는 깊은 좌절감은 비주류 ‘86’으로 그러나 나름대로 학생들에게 그 정신을 은근히 과시해왔던 나에게도 절망적으로 다가와 있다. 제도적 교회의 그 공고한 벽들, 철저히 현실적 논리에 지배당하는 거룩한 것들의 타락, 성과 속을 나누는 고리타분한 부자유들, 무엇보다 다시 500년 전으로 회귀한 교권주의 형식논리들.

동료 선생들과 함께 나누는 이 좌절감의 무게감만으로 따지자면 이군보다 우리가 먼저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겠으나, 이상을 따르기에는 이미 무거워져버린 현실적 삶의 무게에 짓눌려 비루한 생활인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차마 이군에게 그것은 용기라 치켜세우지는 못하겠으나, 그런 결정을 존중하고 이군이 선택한 길을 당당하게 가라는 소심한 격려 한 마디 전달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도 ‘현실’과 ‘이상’의 격차를 좁히고자 몸부림쳤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세대에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 곧 이상을 향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맑스주의, 비판이론, 문화적 민주주의 등 당대의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변혁을 통해 이상의 근접거리를 확보하고자 기꺼이 희생을 택하는 이들이 있었다. 몸을 던지고, 감옥에 가고, 학교를 떠나 공장으로 가는 이들은 그런 투쟁이 이상을 현실화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터.

어쩌면 그들이 학교를 떠나 현장과 실천으로 삶의 현장을 옮긴 이유도 이군이 감행한 새로운 여정의 바로 그 명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 말하며 또 숟가락 슬쩍 얹어 놓으려 하냐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감은 여전하다는 비겁한 위로도 하나 더 전달하고 싶다. 물론 “세상은 원래 그래”라고 꼰대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계를 직시하고자 함이다.

그 한계의 그림자는 이군이 몸담았던 이곳에조차 깊이 드리워져있다. 신의 이름으로 외치는 모든 기도가 세상의 한계 안에 갇혀버리는 현실을 날마다 목도하면서 그 옛적 예언자들의 고행과 고난의 이유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인간현실의 한계가 하나님나라의 이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이상은 현실의 한계를 전복하거나 무력화함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묵시로, 또 계시를 통해 성취된 미래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성취된 미래를 살아가겠다 하는 이들이 현실의 한계와 스스로 타협하고 이상을 성취된 현실로 둔갑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이군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오늘의 본질이 그러하다. 그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일이 구차한 것이겠지만, 이 둔갑술의 실체가 바로 과거 민주화를 외친 이들의 이율배반적 삶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할 숙제가 요즘 무겁게 다가와 있다. 성취와 성공을 자본축적의 계산법으로 환원시켜 놓은 그 책임 말이다.

모든 운동의 진정성은 자기희생에 있다. 희생 없는 운동은 난무하는 구호에 매몰되어 주동한 이들을 권력화 한다. 현실정치의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정치학적 견해일지는 모르겠으나, 신학적 정치는 그 정점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놓여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의 간격일 것인데, 희생보다 권력과 재물을 앞세우는 교회의 타락 역시 우리 모두를 좌절감으로 몰아가는 원인의 실체이다.

굳이 ‘86세대’의 타락이라 말해야 할지 아직 주저되지만, 세속 정치의 변질의 원인도 그 본질은 같다. 자기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정치가 얼마나 피폐한지 우리는 지금도 목도하고 있다.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제 정치적 이권과 자리에 연연하며 추해지는 그 시절의 영웅들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성이든 속이든, 그들의 진정성은 그들의 희생에 달려 있다. 그들의 말보다 그들의 희생이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좁힌다.

2019년, 또 다른 이군들을 응원하며

2019년 연초에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통해 우리 안의 욕망을 대면했었다. 하반기에 터진 조국 사태는 검찰개혁의 과제와는 별개로 자녀를 통한 우리 세대 부모들의 출세욕망이 얼마나 고도화되어 있는지 실감나게 폭로하는 계기도 제공해 주었다. 민주화 세대가 구축해 놓은 촘촘한 기득권 구조, 그 현실적 타협이 재벌구조와 학벌사회를 더욱 공고히 떠받쳐 주고 있는 그 기막힌 모순적 상황들 말이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여겼지만 실상 그들과 우리가 합작하여 만들어 온 신계급사회의 현실이 청춘들에게 악마처럼 보일 것이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었다. 훈계하고 가르치고 지적하고 지도하며, 87년 이후 그 시절, 그 역사를 자기정당화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이들이 그들에게는 답도 없는 ‘꼰대’로 비칠 것이라 상상조차 못 했다. <스카이 캐슬>에서 조국으로 이어진 사태의 의도치 않은 성과라면 기성세대에게 이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청춘들의 이탈은 내가 있는 학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짜 놓은 ‘이상’의 하부구조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는 청춘들의 이탈과 실험은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정부와 관, 혹은 기업이 지원하기도 하는 이런 실험들에 생존과 생업을 목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청춘들은 이런 실험을 통해 자신들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이상’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얻고 싶어 한다.

정부, 관, 기업이 나서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을 실체화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교회의 현실은 한참이나 멀다. 한때 잠시 요란했던 <3.1운동 100주년>의 온갖 행사와 세미나와 프로그램에 청춘들의 자리는 없었다. 100년 전 마을과 고을에서 처연히 나섰던 소년, 소녀들의 목소리보다는 검은 양복 빼입은 이들이 무대를 장식하며 100주년 행사를 100살 만큼이나 늙게 보이도록 애를 쓰며 그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치인들을 격려한다며 연 ‘국가조찬기도회’는 두고두고 비판을 들었다. 번지르르한 얼굴들이 둘러 앉아 권력자들과 함께 웃을 만큼 우리의 현실이 희망적인가? 심지어 날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권력을 욕망하는 가짜 목사의 천인공노할 국가전복적 망언에도 속수무책인 한국교회의 현실이 우리의 청춘들에게 무슨 ‘이상’을 제시하는가? 대법원 판결에도 아랑곳 않고, 교단헌법도 무시하는 그 당당함을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할 것인가?

도처에서 이군과 같이 기존 체제를 이탈하는 청춘들에게 기성세대가 할 일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그들의 이탈이 새로운 ‘이상’을 향하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라는 촌스러운 회유도, 현실이 그런 거라는 비열한 비웃음도, 격려한답시고 지껄이는 훈계도 다 그만두고 그들의 이탈이 또 다른 대안이 되는 가능성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기다리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아니 기다리겠다는 압박도 잔소리다.

대림절, 성탄의 계절이야 말로 기다림의 때가 아닌가. 오랜 기다림 속에 오신 메시야는 말씀이 육신이 된, 이상을 현실화시킨 존재이다. 그의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이 이상하던 그 나라의 현실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는 그 현실을 가능케 한 그분의 희생과 십자가의 미래가 함께 와 있다. 그것이 이상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이 능력을 회복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는 청춘들에게 진정한 소망을 증언하는 교회를 기다리게 되는 2019년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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