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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예배의날

[생활설교]심판하는 자냐, 심판 받는 자냐?

심판하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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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혜
기사입력 2020-01-15

10. 심판하는 자냐, 심판 받는 자냐?

(마태복음 12:38-42)

▲ 하얀 구름과 검은 구름이 뚜렷이 대조되어 있다. 이것은 곧 다가올 폭풍을 암시하는 것이다.     ©문종성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41-42).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난해 구절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어느 난해 구절 못지않게 어려운 구절 같다.

우리의 상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고,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언제 예수님을 믿었는가?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으며, 나아가 이 세대 사람들을 어떻게 정죄하겠는가?

우리의 상식은 예수님이 재판장이시다. 마태복음 25:31 이하에서 보는 대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5:26-27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라고 선언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제자들이 장차 이방인들을 심판한다고 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시니까.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도 심판을 받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어떤 목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당장에 모든 보수적인 목사나 신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과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오늘의 우리가 감히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오늘날에는 어느 목사님도 이 말씀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에 이 말씀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장차 심판관이 되는 것은 열두 제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이 장차 천사도 심판한다고 했다(고전 6:2-3).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모두 재판관들이 될 소망이 있지 않은가! 장차 주님이 만국을 심판하실 때에 또 누가 심판권을 가지게 될 것인가? 계시록 20:4에서는 이렇게 밝히 설명하였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더라.”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할 사람들, 죽음으로 말씀을 지켜 목 베임을 받기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설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직 본문에 나타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의문점이 있다. 곧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육신적인 심판을 면했을 뿐이 아닌가? 영혼의 구원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그들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을까?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물론 십자가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자기들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어떤 소망이나 확신도 없었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알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그들이 언제 세례를 받았나? 성령을 받아 거듭나기를 했나? 그러한데도 그들이 어떻게 심판관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일까?

 

1.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1) 예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들의 회개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로움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에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였는가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2) 그러므로 우리도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철저히 회개했는가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요나가 한 일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는 니느웨에서 하룻길을 행하며 외치기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라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회개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물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왜 심판하시는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나의 전도는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니느웨에는 엄청난 회개가 일어났다.

요나서 3:5에 보니 왕이 아직 어떤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니느웨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대소를 막론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라고 했다.

3:6에는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고 했다. 왕이 어떻게 체면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왕이 니느웨에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3:7-8). 혹시 사람에게는 금식하라고 명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죄 없고 무지한 짐승들까지도 금식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3:9에서 왕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의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왕은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서 4강에 들어가게 되자 “4강 신화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참으로 요나와 니느웨 성의 이야기는 신화 이상의 신비로운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의심만 하지 말고, 이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장면들을 우리가 조용히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는 오늘의 우리들 자신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다.

 

3)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요나의 예언대로 멸망하였으리라.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이 장차 심판관이 되리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닌 극히 작은 일을 했을 뿐인데,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복이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처럼,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하나님께 엄청난 기쁨을 드렸다.

회개를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우리는 누가복음 7:29-30에서 발견한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겸손히 회개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롭게 들리고 깨달아진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4) 바리새인들은 왜 회개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고정관념과 선입관념이 문제였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을 깨뜨려야 드디어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갔다가 그는 새로운 것을 크게 깨달았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 이때가 바로 베드로의 선입관념과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이 고정관념과 선입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세계가 드디어 보이게 된다. 어떤 고정관념일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은 다 멸망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우리들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오히려 거절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한 그들을 받으신다. 그런데 우리는 보수적이라고 할수록 더욱 마음을 닫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2.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1) 대관절 스바의 여왕이 무엇을 했기에 그런 엄청난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말인가? 그가 땅 끝에서부터솔로몬을 찾아왔기에 귀한 것인가? 그는 단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던 것일 뿐이 아닌가? 그런 일은 국가 간의 외교상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다른 나라의 왕들도 많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왕들 모두가 장차 이 여왕과 똑같은 권세를 가지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2) 예수님이 왜 남방 여왕을 칭찬하셨을까?

예수님은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물론 다른 나라 왕들도 먼 곳에서부터 왔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사람들에 대하여는 칭찬을 하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그 왕들이 찾아온 동기나 본심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자기의 딸을 바치면서 솔로몬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왕비가 700, 후궁이 300”(왕상 11:3)이나 되었다. 그러나 남방 여왕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지혜를 사모하여 솔로몬을 찾아왔던 것이다.

스바의 여왕이 찾아온 사실을 알려주는 열왕기상 10:1에서는 그가 찾아온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이 이르니.” 그의 의도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온갖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왔다. 물론 자기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는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만나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깊은 지혜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드디어 스바 여왕이 정신이 현황하여 감탄 또 감탄하였다. 다른 왕들도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그렇게 한 왕이 없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고 계신다. 오늘날 교회에 찾아 나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동기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도 너무도 많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던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쫓아내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21:12-13)라고 책망하셨다. 제사장으로부터 모두가 강도들이 되어 있었다.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는 어떨까? 안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기를 볼 줄 알고, 솔직해야 한다.

 

3) 우리도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망을 느낄 때가 많았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잘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평신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들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많이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 나다나엘은 아주 드물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그를 잘 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누구를 잘 안다고 하실까? 예수님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율법사들도 잘 아셨다. 그러기에 무섭게 책망도 하셨다. 문제는 심판 날 내가 너를 아노라.”라는 선언을 듣는 일이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은 유대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 성 안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셨는데”(5:1), 그만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 22:30-31에도 마찬가지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을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교회에는 왜 다니는가?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있는가? 진리를 사모하는가? 하나님께 은혜 받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는가? 참으로 천국을 소원하면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가?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에 하나는 카톨릭교회에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는 것을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돈도 안 받고 구원의 확신이라는 면죄부를 팔아먹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자들을 기뻐하실까? 교회가 할 일은 신자들에게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주어서 방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가 제일로 좋아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를 일깨워야 한다. 그래서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았는데도 다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3.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좀 더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1) 참 믿음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에 오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서는 예수님의 전도 제1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이 회개다. 그러니까 바른 회개가 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믿음도 갖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참 믿음이 어떻게 오는가를 잘 일깨워주셨다. 회개가 바르게 될수록 마음이 넓어지고 진리에 바로 서게 된다.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철저히 회개할 때에 마음이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세계가 보인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5에서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목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 첫째가 청결한 마음이요, 또한 선한 양심이다. 이것이 없는 믿음이란 모두가 거짓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1:6-7에서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탄식하였다.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믿음이 거하게 된다.

 

2)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가?

고린도전서 1:24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씀한다. 남방 여왕은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의 소문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만나보려고 하였고, 그 지혜를 사모하여서 만사를 제쳐놓고 멀고도 먼 길을 사양치 않고 솔로몬에게 찾아왔다.

잠언 8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설명하는데, 이 지혜가 곧 그리스도임을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22-23)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실 때에 내가 하나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였다.”(29-30)라고 말한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잠언 9:10이나 욥기 28:28뿐 아니라, 미가 6:9에도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그렇다. 그런데 그 지혜는 어디에서 올까? 욥기 28장에는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라는 말씀이 거듭 나온다. 욥은 간절히 찾고 또 찾았다.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과연 그 지혜가 어디에 있을까?

이사야서 11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이렇게 나온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11:1-3). 여기에 그 답이 있지 않은가? 여호와의 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이 바로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다. 그분이 오시면 된다.

모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다. 그랬더니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다. 드디어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들을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였다. 이런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최소한 우리의 자녀들을 약속의 땅, 저 아름다운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없이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함께 지식, 곧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지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 마음을 드리자.

 

3)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은 그리스도를 잘 몰랐지만,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님이 선언하셨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철저히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토록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한 남방 여왕도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될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를 아는가? 예수님도 당신을 안다고 말씀하시는가? 혹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나 하시지 않는가? 철저하고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마음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186-5)라고 찬송할 수 있다.

그들은 장차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할 심판관들이 될 약속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약속이 있겠는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님을 아는 지식”(3:8)! 이보다 더 고상한 지식은 없다. 이 지식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을 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 오늘 우리는 그것을 결단해야 한다.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앉아서 만국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는가? 아니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사람이 되겠는가?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나균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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