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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예배의날

[신학思索]예배보다 중요한 것 있을까?

행정명령이냐 예배 우선이냐의 갈등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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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기사입력 2020-04-02

신학사색] 행정명령이냐 예배 우선이냐의 갈등사이에서 

 코 로나 19 사태로 한국 교회의 예배 문제를 두고 논란이 많다. 서울 시장, 박원순과 경기도 도지사 이재명의 교회 폐쇄 명령에 대하여 한국교회 반발이 심하다.

 

미국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뉴욕 시장 빌 더 블라지오(Bill de Blasio)의 교회 폐쇄 명령에 대한언급이 미국 보수진영에서 일파만파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한 논쟁을 헌법, 행정 명령에 대한 법리적 해석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있다. ,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는냐? 예배당 밖에 드리느냐? 등 예배 장소의 문제에 앞서, 더 본질적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의 장소를 예배당으로 고집해야 하는가? 예배에 대한 공권력 행사가 종교탄압이며 헌법의 질서의 파괴가 아닌가? 등등의 논란이 많다.

 

예배당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 관계성 때문이다. 교회당 중심 예배의 전통성 때문이다. 일부는 비판하거나 부인하지만 약한 교회의 재정적 문제라는 현실성 때문이라는 이유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고 그곳에 예배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바이러스의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신념 때문이다.

 

예배당을 사회적 거리 두기 차원에서 교회당을 폐쇄하는 이유는 집단 감염의 예방 때문이다. 그러한 행정 조치는 종교의 자유(헌법 34), 집회의 자유(헌법 21)를 어긋난 조치가 된다. 특히, 교회와 국가, 국가와 교회간의 갈등은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한 행정 조치가 잘못 인식하거나 잘못 적용할 경우 종교탄압이 될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나 한국 교회사에서 예배를 생명같이 여기고 순교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그 때의 종교 탄압과 교회 박해가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행정 명령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는가?

 

코로나 19의 감염에 대한 사전 예방적 조치를 소홀히 하고 미흡한 것은 국가적 책임이다. 그러한 부족하거나 잘못된 조치 속에서 감염된 성도가 교회 공동체, 교회 집단에서 확산되어, 또 다시 2. 3차로 확산될 경우, 교회가 사전 통제를 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고 교인들이 감염의 매개체가 된다면 이웃사랑의 원리에 위배된다.

 

이러한 대감염 사태에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교회는 성도를 돌봄의 차원에서 상호협력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회당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임시방편의 간구 책이 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교회 안에서도 본당에서 예배하는 것은 교육관, 교실 등에서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별다른바 없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는 인격적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가 제한된다. 공동체적 지체의식이 결여된다는 등 문제가 야기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염 상황 속에서 온라인 예배는 임시방편이고 차선책 예배 일 뿐이다.

 

속히, 대감염 사태가 종식되고 정상적인 공동체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 질문이 있다. 예배가 과연 무엇인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당 예배를 정규적으로 잘 드렸다고 할지라도, 예배자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예배의 중요성, 예배(제사)장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예배(제사)가 없어서, 혹은 예배 장소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성전 예배(제사)를 드린 후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답게 살지 않았다. 그들의 길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것만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을 삶의 예배로 보셨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 사랑의 영성과 자세로 또한 이웃 사랑의 삶의 자세를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7:6).

 

그들은 하나님께 정한 날,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그 이후의 삶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를 곧 잘 행하였다(7: 9).

 

그들은 물욕과 탐욕 때문에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7: 9) 또한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그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줄 착각하고 있었다(7:10).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관과 예배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모양이든 형식적으로 성전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자기도취에 빠졌다.

 

그들의 또 다른 자기당착은 그들이 성전에 있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만연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 제사장 시대의 역사적 교훈을 잊고 있었다. 실로에 법괘를 전쟁터에 가지고 오면 저절로 승리할 줄 착각했듯이, 그들이 실로에 하나님의 성막이 있고, 그들이 그곳에서 예배를 부지런히 드렸지만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7: 11).

 

이러한 하나님 없는 예배, 하나님이 역겨워하는 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형식적인 예배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셨다(7: 22-23)

 

하나님은 예배는 있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7: 24-28)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이러한 영적 위기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처럼 상한 심정을 가지고 눈물로 외치는 선지자가 요구된다.

 

시대에 비관하거나 비양 거리거나 맹목적 냉소적이고 비판하기보다 눈물로 외치는 제 2, 3의 예레미야가 요청되는 한국교회이다.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었다. 예배의 회복은 삶의 회복이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회복이 없었고 예배의 회복도 없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의 눈물이 이 시대를 조망하는 그 의미가 크다.

 

칼빈 신학자 갓프리 박사는 그의 저서 칼빈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칼빈의 예배관으로부터 4가지 원리들 도출했다.

 

그 네 가지 원리가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배관에 나타나 있다고 본다. 칼빈의 예배관의 4가지 원리는 첫째, 말씀 중심의 원리이다. 둘째, 영성의 원리이다. 셋째, 단순성의 원리이다. 넷째. 공경의 원리이다.

 

예레미야와 칼빈의 예배 본질을 교차하면서 또한 이 시대의 예배관을 조명할 때, 그 시사하는 바가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 첫째는 예루살렘 백성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8: 5).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킨다는 경우를 예를 든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엎드러지면 일어나고, 떠나갔으면 돌아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떠나 물러갔다. 거짓과 악을 행하는 모습이 전쟁터를 향하여 말 달리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했다. 형제들을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했다. 거짓말하기를 가르쳤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알기를 싫어했다.

 

이스라엘이 그처럼 고집스럽고 완악한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의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8:7).” 왜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했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을 맡은 서기관들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했기 때문이다(8:10). 영적 지도자들로서 본연의 사명인 말씀 전파 사역, 말씀 가르침 사역에 불충성 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선지가 예레미야는 너무나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당할 처참한 심판을 알았기 때문이다(8;16).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신다. 바벨론의 말발굽 소리가 마침내 북쪽 국경지대인 단에서 들려온다. 이 심판은 어떤 술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뱀과 독사가 사정없이 그들을 물것이다.

 

이런 가운데 백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을 깨닫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다. 도리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자멸하는 소리를 내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라며 원망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더불어 그들이 당할 고통을 들었을 때 예레미야에게 슬픔과 근심이 몰려왔다. 이것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취할 마음 가짐이며 자세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8;18)라고 탄식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때는 지나고 심판만 남았다. 치료받을 기회를 놓쳤다. 길르앗은 유향의 산지로 유명한데 이것은 당시 병 치료의 약재였다. 예레미야는 약재도 있고 의사도 있는데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탄식했다.

 

예레미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야로 흘렀다. 죽임을 당할 백성을 생각할 때 그의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예수님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

 

지금 코로나19의 사태가 아직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때, 한국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는 이 시대와 뭇 백성들을 바라보며 통렬한 울부짖음이 요청된다. 죄로 인해 심판 받을 그들을 보며 상한 심정으로 울고 복음의 백신으로 백성들의 병든 마음과 상한 심령을 치료해하겠다.

 

 
*정준모 목사(콜도 말씀제일교회, Ph.D & D.M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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