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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설교] 행복의 현주소를 찾아서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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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기사입력 2020-10-31

 

▲ 1984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린 '84세계기도대성회에서 김준곤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마태복음 5:3, 8


1. 명절을 통해서 본 행복

  보통 우리들은 복을 생각할 때에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생각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것이고, 오래 오래 계승해 온 지식의 한 토막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행(幸)을 붙여서 행복이란 말이 요즘 많이 우리의 혀끝에 오르내립니다. 행복을 손에 꼭 쥐어 본 사람이 없습니다. 행복의 얼굴이나 실체를 육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산 넘어 바다 건너 행복을 찾아간 나그네는 옷소매에 눈물이나 듬뿍 적셨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별달리 행복을 찾아서 노력하는 임금님이 계셨습니다. 이 임금님은 보천지하(普天之下)는 막비왕토(莫非王土)니까, 모든 신민(臣民), 모든 인민의 재산, 모든 것이 왕의 행복을 위해서만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매 일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치와 호사를 누리면서도 그는 늘 불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그 임금님을 찾아왔습니다. “상감마마, 상감마마는 행복을 찾는 방법을 모르십니다. 천하는 천하 사람의 천하이온데, 천하 사람을 행복하게 해 드릴 때에 상감마마도 가슴이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에 임금님이 새 천지와 새 일월(日月)을 보게 되었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행복은 억조창생(億兆蒼生)이 한 날 한 시에 맞는 설날의 기쁨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한두 집의 생일잔치나 혼인 예식으로 천하의 명절이 될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부활절(復活節)의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 년 세시를 통해서도 행복의 현주소가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는 것임을 우리의 짧은 생애에서 체험을 거듭해 온 바입니다. 기쁨은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행복은 아들네들을 기쁘게 해 주는 데 있고, 아들네들의 행복은 부모님들을 경애함으로 행복하게 해 드리는 데에 있다는 사실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2. 사랑은 기술
  우리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첩경에는 마(魔)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마가 붙는다는 말들을 합니다. 정신 위생에 첫째로 좋은 약이 사랑이라는 묘약이고, 우리의 이목에 접해 오는 모든 매스 미디어는 다 사랑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레 사랑의 강론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을 것 입니다. 과용이고 낭비 입니다. 누군가가 용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란 말을 했습니다. 사랑을 닦고 길러서 그 향기로운 개화를 위해서 원예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데, 참으로 음미해 볼 만한 말입니다. 사랑은 기술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감탄을 하기 전에 곤혹(困惑)을 느꼈습니다. 흔히 부부의 사랑은 노력이란 말이 오히려 좀 더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기술이란 말이 점점 그 정체를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안개구름 사이로 금강산이 그 자태를 보여주듯 말입니다. 안개로 유명한 런던 거리에는 지금도 보이스카우트의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런던 거리에 보이스카우트의 비(碑)가 서게 한 소년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한 부자가 영국에 갔습니다. 길을 찾고 있는데 귀여운 소년 한 명이 앞에 나섰습니다.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미국의 부자는 감사의 표로 돈을 주니까, 이 소년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우리 영국 보이스카우트의 소년들은 좋은 일을 하고도 사례금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안개의 도심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탄복한 이 미국의 부자는 자기 고국인 미국에 돌아와서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사소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소년을 사모하는 미국인 부자의 그 소년 상은 그의 마음속에서 행복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무명의 보이스카우트에게 바쳐진 영원한 송가가 된 셈입니다. 방긋이 웃으면서 “손님,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취를 감춘 이 소년, 이러한 인사말이 쓸쓸하고 외로운 나그네의 심정에 신록 같은 한 아름의 뭉클한 행복감이 되었습니다. 그 열매는 풍성 한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는 영국 소년의 정신적인 부가 되었습니다. 행복이 그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잡기가 어렵습니다. 문호 톨스토이는 행복보다 불행 의 가짓수가 더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건강은 일색 (一色)이나 병은 천만 가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의 연탄가스는 어디서 스며드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마음의 병에서 눈을 뜹니다. 독점욕, 이기주의, 지배욕,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데서 우리의 인격과 품성이 자란다는 바탕은 불변색입니다. 나는 어느 날 조선호텔의 로비에서 호텔 입구의 광장을 무심코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미끈한 세단차가 들어 왔습니다. 거기서 비서인 듯한 청년이 가방을 들고 그를 따르고, 마중 나온 사람은 우산을 바쳐 들고, 그 묵직한 거물급 인사를 부축을 하듯 모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풍기는 것은 지옥 냄새였습니다. 어쩌면 그 얼굴이 그렇게 그늘지고 어둡고 무시무시하고 사나울 수가 있을까요 ? 간담이 서늘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이었습니다. 여고생 인 듯한 두 소녀가 우산 하나를 둘이서 받쳐 들고는 세상만사가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듯이 희희 낙락하며 호텔의 정문 쪽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천당과 지옥의 그림을 본 듯이 생각되었습니다.

3. 한번밖에 없는 행복의 개화
  미국에 어떤 가난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농토를 경작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자동차 부속품을 한 개씩 사모아 가지고 조립을 완성 했습니다. 털털거리며 뛰어 다니는 싸구려 차가 하나 생겼습니다. 청년에게는 그 차가 어떻게 좋든지, 차에다 입을 맞출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농토에서 석유가 터져 나오자 그는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젠 수만 불을 주고 고급차를 샀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털털거리며 다닐 때의 그 차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청년에게는 불만이었습니다. 자동차 회사에 가서 좀 털털털털 소리가 나게 개조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할 때의 그 차의 맛은 영영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잃어버린 행복은 영원히 다시는 되찾을 수가 없는 먼 곳으로 가버렸고, 영영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여기 인격의 비밀과 감정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도의 문화와 함께 물질 위주가 되어 갑니다. 인간이 기계화 되어 가는데 따라서 인간의 원색적인 행복감은 변질이 되어 갑니다. 보다 고급을 찾기 시작 합니다. 그러자 여기 등장한 것이 시장성 입니다. 자기의 인격도 인품도 모두가 화장을 합니다. 전시 효과를 노립니다. 심한 말로, 양심까지도 시장성의 뒷받침이 있을 때만 가치가 생깁 니다. 수단 가치가 본질 가치로 탈바꿈을 해 버린 것입니다.

  여류 소설가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때 아주 불행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자살을 하겠다고 서울 근교의 어느 지점을 찾아갔습니다. 산골짜기인데 등산객을 위한 산막(山幕)과 같은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마루 끝에 앉아서 쉬겠다고 머무는 동안에 그 안에서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크게 놀란 그 분은 그 여인이 우는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자살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자살하기 위해 갔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 여자를 위로하느라 이 말 저 말 살아야 된다는 좋은 선지식(善知識)의 보따리를 풀러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것이 행복의 번지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따금 나는 가정생활에 실패하고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여인들을 상대하게 됩니다.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함정은 대개 자기가 판 묘혈(墓穴) 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모조리 토해 놓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실 하품이 납니다. 내 귀에는 그게 별로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의 가정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습니다. 딱하기만 한 이야기였습니다. 술주정뱅이가 양복저고리에 시큼한 냄새나는 요리를 왁 토해 놓아서 옷이 엉망이 되는 정도의 심정에 빠집니다. 그런데 묘했습니다. 울고 어쩌고 한 여인의 얼굴은 다음 순간 다시 보니까 여고생 같이 어린애답게 보여서 귀여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도 웃고 말았습니다. 이 순간은 나와 그 여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몽땅 어디에다 내려놓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그 여인이 자기의 짐을 나에게, 나는 예수께 내려놓게 되어 세 사람은 거뜬한 기분이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4. 고통의 신비약
  어느 대학에 맹인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새로 그 학급의 교수가 된 젊은 학자는 자기 강의를 열심으로 듣고 있는 그 맹인을 위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점자로 노트를 하는 그 맹인 학생이 따라갈 수 있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급의 학생들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그 강의를 알뜰하게 듣게 되었고, 학급의 학생들이 모두가 그 맹인에게 노트를 빌려 주는 친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소모함으로 인간은 자아 완성을 하게 마련 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생활 필요품이지 사치품은 아닌 점입니다. 생명수와 같습니다.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성은 그대로 통화(通貨) 입니다. 만(萬) 인간을 흡수합니다. 철물이 자석에 달라붙듯이 달라붙기 마련인 것입니다. 천리(天理) 인 것입니다. 그 교수는 가장 귀한 것 하나를 그 불행한 학생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이 맹인은 혼자 고통 받는 것으로 학생 전체에게 행복을 공급하는 저수지가 된 것입니다. “그대로 행복하게 만들 수가 없다면 난 끝끝내 행복할 수가 없다네.” 이것은 미국의 대중가요이지만 이 속에 행복 철학의 오의(奧義)가 숨 쉽니다. 1885년 을유년(乙酉年), 이 무렵의 우리의 인심은 이기주의 악귀에게 파 먹혀 빈 껍질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지령으로 언더우드가 한국에 전도하러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독교사입니다. 1945년 회갑년(回甲年)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신학 박사도, 목사도, 전도사도,  장로도, 집사도, 평신도도 모두가 유년 주일학교의 학생이 되고, 우리가 돌이켜 어린 아이가 되는 데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입니다. 적은 일이라도 가난한 마음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기술을 배웁시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네가 그것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이 우리 한국의 일상용어에 있습니다. 이 말의 기원과 소장(潤長) 을 찾기는 힘듭니다. 다만 우리는 기독도로서 하나님이 키워 놓은 이 세상 사람들을 존중해야 되겠다는 겸 허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감각을 맑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행복은 하나님이 지나간 아침 이슬을 보고도 기뻐합니다. 진주 이상으로 말입니다. 깨끗한 가난, 깨끗한 부유, 그리고 사랑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흔(傷痕)과 통합니다. 행복의 현주소는 예수의 사랑과 십자가에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속에 풍성한 사랑을 키웁시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73년 3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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