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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설교] 생명의 역리(逆理)(눅9:24)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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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기사입력 2020-12-05

 

▲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누가복음 9:24


우리는 살고 싶고 또한 보다 선하고 아름답고 참되게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남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도 저만 잘 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폐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위하여 애써 모은 소유도 힘써 닦은 예술과 교양도 무(無)로 돌아가고 지식도 필경은 폐하여(고전 13 : 8) 나의 알 몸뚱이마저 죽어 티끌로 돌아가고 말면 설혹 범신론의 주장대로 신(神)의 파편이든지 우리가 죽어 신(神)의 바다에 용해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로서의 ‘나’는 무(無)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옛날 이집트의 왕들처럼 우리의 사체(死體)를 불멸의 탑 속에 보전할 것인가. 나의 혈족 속에 혹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깃들여 살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대로 산 채로 산 것은 못 됩니다. 내가 살 곳은 어느 사물이나 먼 미래나 어떤 개념도 아닙니다. ‘나’의 주소는 오직 한 분 ‘당신(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나 되는 길
  나무는 무엇보다 나무여야 합니다. 담 밑에 의젓이 홀로 피어 있는 노랑꽃은 그대로가 하나님을 쳐다보는 성스런 얼굴입니다. 나의 거룩한 최소 최고의 덕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뜻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 것이 인류의 정신사였으나 과학자가 찢어 발겨 본 생리학의 어디에서도 심리학자가 분석해 본 정신 현상의 어느 부분에서도 철학자의 개념이나 사색의 어느 그물에서도 산 채로의 ‘나’를 붙잡은 예는 없습니다.

참으로 그는 생각할수록 몰라지는 수수께끼이며 무엇인가 자신에게 물어도 자신에겐 대답이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그는 무엇이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닌 자체 속에 모순을 범하는 이율배반(롬 7:24)입니다. 이름도 주소도 결정도 없는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생물학계의 예외자요, 괴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심판 날 ‘나는 너를 모르노라’ 선언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까뮈)입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될 악몽이요 환상이요, 거짓입니다.

우리는 이 가공적인 거짓 나를 꾸미고 섬기느라고 겹겹이 쌓아 모든 생애를 송두리째 바쳐 왔고 생명을 소진해 왔습니다. 이 환상의 그림과 괴물에게 바쳐진 희생자들이 언젠가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분함과 억울함에서 슬피 울며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성(擬城) 으로 비대해 진 괴물의 가면을 벗겨 보면 알맹이 없는 텅 빈 공허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이기주의(죄인)
  이 괴물의 이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요, 자기가 신(神)인 이기주의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참되고 아름다운 듯 싶어도 그의 온갖 노력이 거짓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거짓인 자아의 중심을 싸고돌기 때문 입니다.

인도(人道)나 애국이나 신(神)들의 이름으로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를 위하여 영웅적으로 몸을 불 사르는 데 내어주는 성자적인 둔갑을 합니다.

때로는 절망하여 자신이고자 함올 위해 신(神)을 거역하고 저주와 절망을 스스로 택할 만큼 지독히 크고 고집 센 고고(呱呱)의 혼이 되어 자율 인간의 최후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신(神)이 자기의 주권을 침해함이 없는 한 신(神)을 섬기는 데도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이기주의 죄인임을 고백하며 내가 아는 사람도 그러하다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실이 바로 거짓의 중심을 싸고도는 삶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기주의는 도덕을 종교로, 예술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방어선은 물샐틈이 없습니다.


거짓 나의 종말
  이 거짓된 나의 생의 특정은 메스꺼움(구토)이요, 미움입니다. 내 허수아비는 타인의 허수아비 사이에 끊임없이 비교와 구별의 담을 쌓고 경쟁과 전투 의식으로 지쳐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표면으로는 친한 듯 싶어도 심리의 심층부에는 무서운 이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이기주의를 가장 미워합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자기가 미워하는 이기심을 보고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발견하고 미워함을 알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미움이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이제 이렇듯 자기를 섬기는 생활이 곧 불안이요, 죽음임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때 사태는 전보다 더 악합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과 함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롬 7:24)하고 구도(求道) 인간의 종말의 벼랑에서 그는 절규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황야 지평선을 넘어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디로 갈 수 있는 방향도 할 수 있는 노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철학이나 수양이나 다른 신들의 이야기가 먼 곳에 사라져 가고 텅 빈 영혼의 밑창에 열린 무덤 같은 곳에서 영혼의 깊은 밤의 신음과 몸부림 속에 어떤 지적이거나 도덕적 자력의 활동보다 근본적인 태아의 태동 같은 생명의 기다림과 애달픈 목마름과 슬픔과 가난을 거쳐 겸허하고 절실한 열망이 기도가 되어 마침내 내 인생의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는 다르게는 어찌 할 수도 없는 근본 전환이 생깁니다. 이것이 회개요, 중심과 방향의 전환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나
  ‘내가’, ‘나에게’, ‘나만을 위하여’ 하던 삶의 원칙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변하고 내가 사는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삶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과 참 ‘나’를 위한다는 말과 그리고 이웃을 위한다는 것은 3위 일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입체적인 사랑의 생활입니다. 지구가 태양의 인력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듯이 이기주의가 자력(自力)으로 자기를 초탈할 수 없으니 저차원은 고차원의 힘을 벌립니다.


생명의 역리(逆理)
  행복을 원하거든 행복 이상의 사명을 따라야 하고, 채우기 위하여 비우고,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며, 대접을 받고자 하면 대접해야 하며, 참 ‘나’를 찾으려거든 나를 버리며, 죽어서 사는 것이 생명의 역리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죄 중에 태어났고 거짓이 중심을 싸고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중심’, ‘참 중심’을 취함이 없이 나의 옛 거짓 자아의 중심일지언정 그것마저 버리고 나면 우리는 우주의 떠돌이별이 되어 허무의 밤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존재의 중심에 취함이 없이는 우리는 차라리 이 죽음의 자아를 구심으로 돌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이제 미련 없이 ‘나’를 죽여 그리스도를 참 ‘나’로 삼아 영원히 참으로 살기를 결심합시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64년 7월  13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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