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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신석구 목사 활동상

한교총, 3.1운동 102주년 기념예배에서 후손에 감사패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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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
기사입력 2021-03-01

▲ 식석구 목사     © 뉴스파워

신석구는 187553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의 평민 집안에서 신재기(申在綺)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1907714일 고량포교회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했으며 그날 밤부터 사흘간 지금까지 지은 죄를 기억나는 대로 고하며 회개기도를 했다.

신석구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후 개성에서 순행 전도사인 정춘수 고량포 교회에 저녁예배 설교를 하러 온 것을 계기로 정춘수와 친분을 맺었다. 그는 정춘수를 따라 개성으로 가서 그의 집에 1년간 유숙하면서 미국인 의사 W.T 리드의 어학 교사로 있으면서 환자에게 선교하는 것을 도왔다. 이후 19083월 개성 남부교회에서 A.W 와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친구 홍종숙의 소개로 선교사 W.G 크렘을 만나 개성 북부교회에서 전도인이 되었다.

그는 19092월 개성 북부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1011월 강원도 홍천에서 본처 사역자로 파송되었으며, 19129월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또한 19149월 가평구역 본처 전도사로 전임되었으며, 191510월부터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를 맡아 복음주의 신앙에 입각한 부흥 사업에 힘썼다. 1917927일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191811월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자로 파송 받아 목회 활동을 벌이다가 3.1 운동을 맞았다.

19192, 신석구는 오화영의 권유를 받고 "나는 나의 몸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찬성하겠다."고 하고 대답을 유보했다. 며칠 후 마침내 독립선언 계획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3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구류되었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형식상 금일 조선독립은 성립되지 않으나 씨를 심을 때에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고 하는 것은 실은 청원이 아니고 독립한다는 것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의 쇠사슬을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다.”

▲ 한교총 주최 3.1운동 102주년 기념예배에서 윌리엄 린튼, 이필주 목사, 신석구 목사 후손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뉴스파워



이후 신석구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2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1921114일 만기 출소했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한시를 지었는데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이 없는 법

신선도 아니고 유자(儒者)도 아니시다.

그리스도 그 크신 이름 땅 끝까지 퍼지리니

스스로 지혜롭다하여 어리석지 말지니라.

달은 지고 구름은 깊고 황혼은 짙어가고

길가는 나그네 방황하며 지칠 때

동천의 샛별이 하늘 빛이 비취니

산야의 한 노래에 마을 문이 열리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 심히 적으며

땅에 묻힌 보화를 아는자 그 누구랴

믿음의 길 따라 이 길로 나아가면

어린아이 그 처음 같아지리라.

어려선 유교의 옛 성현을 배우고

뒤늦게 거룩한 길 따라 진리와 인연 맺었다.

신령한 기운으로 마귀 쫓는 검 빼고

감격한 은혜로 자식들 편달하네.

선한 일에 공로 없으나 믿음의 약속 항상 지키니

장생의 길 예 있도다. 신선 구해 무엇하랴

인생살이 백여년 꿈결 같도다

몸과 맘 다 바쳐 하늘에 충성하리."

 신석구는 출옥 후 19387, 그는 천안 지방에서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일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어 상용, 신사참배, 황국신민 서사, 창씨개명 등을 강요했다. 특히 신사참배문제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 양심의 문제였다. 그는 이를 거부했다가 19387월 체포되어 2개월간 갖은 악형을 당했다가 등창이 발병하면서 석방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19395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로 가서 항일 운동을 지속했고, 19413월에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기독교단의 산하에 두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려는 감리교 통리자의 친일 배족 행위에 반대하다가 강제 은퇴를 당하기도 했다.

광복 후, 신석구는 진남포 유사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463.1절 기념방송을 할 때 "3.1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공산당이 이 운동을 영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을 원고에 넣으라는 북한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는 3.1 운동 당시의 민족적 단결을 여실히 증명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악질적인 비방이며 3.1 운동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반민족적 소행이라고 비난했고, 3.1 운동 당시 우리 한국 내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주객전도라고 비판했다. 결국 방송 개시 10분 만에 방송이 강제 중단되었고, 신석구는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반동적인 인물로서 북한 정권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6년 말, 신석구는 광량만 교회로 전임되어 시무할 때 북한 정권이 주는 공로표창장을 거부하고 김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냉소적 감상문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가 쓴 감상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로부터 북조선 인민 위원회 성립에 대한 감상문

 

기독교가 북조선에 있어서 전국에 비협력자이니 선거에 반대자이니 친미파이니

하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차시를 제하여 감상문을 쓰려함에 만일 찬성의 언어를 쓰면 진정한 호의로 보지 않고 아유구용(亞誘求容)하는 것으로 보아서 도리어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찬성의 언사를 쓰면 정직한 충언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반동분자라는 각인을 받을 것이다.

 

그런고로 진정한 감성을 채심하기는 극히 곤란하다. , 개개인의 감상을 채탐하는 이보다 대중의 추세를 통찰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줄로 알 것이다. 현재 정세로 말하면 식량이 결핍하므로 인민의 새오할이 극도로 곤궁하고 남북이 댕립됨으로 장래에 무슨 불측의 시가 유할까하야 인심이 동되는 것은 형재 정세에 사실이다.

이는 깊이 우려할 바이니 이에 대하여 조속히 선한 방침을 강구조처하시기를 요망하는 바입니다.

 

용강군 금곡면 우동리 기독교조선감리회 목사 신석구"

 

 또한 1949419일 진남포에서 남한 정부의 지시에 의해 51일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려고 계획했다는 이유로 장로교 송영길 목사, 김덕기 목사 등 4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면서 공산당의 정치를 비판했다.

 

북조선 인민 최고재판소의 재판장 김두봉은 신석구에게 "죄는 사형이 마땅하나 일본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특별히 감등하여 10년의 형을 언도한다."고 판결했다. 그 후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1010일 후퇴하던 인민군이 옥중에 있던 우익 진영의 인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신석구 역시 총살되었다. 향년 75.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석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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