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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⑫

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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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기사입력 2006-02-03

중국군의 군관학교는 4개월 과정이었다. 장준하와 그의 동료들은 4개월 만에 장개석의 명의로 된 졸업장을 받고 육군 소위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군 소위이자 중국군의 소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소위 계급장을 달게 된 10명의 동지들이 임천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수천리 길을 떠나는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국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부식비였다. 이미 철이 바뀌어 엄동설한이었다. 사방이 얼어붙는 추위에 내복도 입지 못한 채로 그들은 파촉령 높은 구비를 넘어야 했다. 그때의 어려웠던 사정을 박경수가 쓴 『장준하 전기』중에서 다음 같이 표현한 대목이 있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일행은 다소라도 움푹한 곳을 찾아 나뭇가지를 꺾어다 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매서운 칼날 같은 밤바람만 막으면 동사는 면할 수 있겠는데 그 바람이란게 몇 개비의 나뭇가지로 막아질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졸음을 물리치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잠들게 되면 동사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준하와 그의 동료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닿은 것은 1945년 1월 31일이었다. 일본군부대를 탈출한 지 5개월 24일 만이었다. 그들이 임시정부 청사에 닿아 옥상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는 순간 온 몸이 마비되는 듯하였다. 마침내 청사의 문이 열리고 대한민국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1888~1957)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은 일행을 찬찬히 살피며 사열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같이 말했다.

“수고들 많이 했소이다. 앞으로 나와 이곳에 같이 있을 것이므로 차차 많은 애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요. 오늘은 피로한 여러분에게 긴 애기를 하지 않겠소이다. 곧 우리 정부의 주석(主席)이신 김구선생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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